영국의 건축사가(建築史家) 제임스 퍼거슨(1808-1886)은 현재 일본에서 그를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유명한 플레처(Fletcher)의 저서 “건축사”보다 30년 일찍 방대한 역서 “세계 건축사”(*1) 를 출판한 사람이고, 그 깊은 건축적 사색과 널리 알려진 저작군(著作群)으로 로마 시대 비트루비우스(Vitruvius)와도 비교가 될 정도의 인물이다.(*2)
트로이를 발굴한 고고학자 “슐리만(Schliemann)”은 만년의 대저(大著)인 “티린스(Tiryns)”를 퍼거슨에게 바쳤고, RIVA(왕립 영국 건축가 협회)에서 그 건축사 연구 업적으로 로열 골드 메달을 수여받았다.
메이지시대에 일본에서 처음으로 행한 건축사교육(공부(工部)대학교 및 제국(帝國)대학 공과대학 조가(造家)학과)에서는 그의 저서가 교과서로 사용되었다. 기시다헤데토(岸田日出刀)가 이토주타(伊東忠太)에게서 얻은 정보에 의하면, “당시 건축사의 강의 대개가 퍼거슨 저(著)의 건축사서(建築史書) ("History of Architecture", James Fergusson, 1874)에 의한 직역전수(直譯傳授)였다 ...”(*3) 라고 할 정도로 메이지 시대에 살던 일본 건축가들은 퍼거슨을 잘 알고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아마도 그의 저서가 한 권도 번역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후 Fletcher의 “건축사”(*4) 가 보급됨과 동시에 퍼거슨은 사람들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건축사학상 큰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의 저작 연구도 거의이루어지지 않았다.
제임스 퍼거슨과 (風響社刊 ”건축사가들의 아시아 ’발견’” 에서)
그 이유 중의 하나로서 그 저작 내용 범위가 너무나 넓어서 그 내용을 파악하기가 어려운 것과, 한편 그의 최대 공적이 인도 건축사의 체계화에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일본에서는 이토 주타와 아마누마 순이치가 인도 건축에 관심을 갖고 현지 여행을 하였으나, 그 후 인도 건축은 일본 건축계에 있어서관심의 대상이 되지않았고, 인도 건축사를 전공할 연구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로 인해서 일본에서는 인도 건축사와 세계건축사의 전개에 있어서 퍼거슨의 존재는 거의 없었으므로 일본 에이코구사(彰國社) 건축대사전에 퍼거슨의 항목이 없는 것도 그다지 놀라운 것이 아니다.
최근에 아시아 연구가 늘어나게 됨에 따라 비로서 퍼거슨도 다시 주목을 받게 되었다. (*5)
본고는 퍼거슨에 의한 인도 건축사 연구의 내용을 개관하는 것이 목적이지만 퍼거슨의 전체상이 잘 알려지지 않는 상태에서는 인도건축역사의 세부사항에 대한 논의는 차치하고, 그의 건축사상 및 전 저작체계와의 관련을 맺는 것으로 그가 어떻게 하여 인도 건축사를 만들어 왔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퍼거슨 원화(原畫) “Lingaraja사원”
제임스 퍼거슨은 19세기를 대표하는 건축사가의 한 명으로서 많은 명예를 얻었다. 윌리앰 화아트(William White)의 소개문에 따르면 인도제국 훈작사(勳爵士), 영국학사원회원, 옥스퍼드 대학 법학 박사, 에딘버러 대학 법학 학사, 국립 아시아 협회부회장, 왕립 영국 건축가 협회 부회장 등 열 개 가까운 직함들이 있다.
그러나 그는 대학에서 건축을 배웠던 것이 아니라 런던의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전부 혼자서 건축을 공부하며, 자비로 세계 건축을 조사, 연구한 저작가이다. 아카데미즘 출신 건축사가 아니지만, 당시는 건축가가 되는 것도 대학보다 건축가의 아틀리에에서 도제 수업을 한 것을 생각하면 그다지 불가사의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경험이 퍼거슨에게 자유로운 정신을 주었다. 아카데미즘의 정설이나 건축계의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눈으로 건축을 보고, 자기 머리로 생각하여 시류에 역행하여도 자기 뜻을 일관하였다.
퍼거슨 평전이나 연구서는 본국 영국에서도 출판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생활은 물론, 그 학습과 연구 과정이 상세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수많은 책들의 단편적인 기술을 기반으로 재구성을 해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6)
제임스 퍼거슨은 1808년 스코틀랜드 구(舊) 에어셔주(州)의 주도 에어에서 군의관 윌리엄 퍼거슨의 둘째 아들로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전근으로 에딘버러에서 성장한 후, 런던 남서부 하운스로(Hounslow) 사립학교로 전학하여, 졸업한 후 20살 무렵 인도 캘커타에 건너갔다. 그리고 자기 형이 파트너를 한 페얼리 퍼거슨회사에 근무하였으나 얼마되지 않아 회사가 도산하여 그는 인디거농장을 경영하게 되었으며, 또한 캘커타에서 자기형과 무역회사를 차렸다.
인디거농장이 크게 성공하여 부자가 되었지만 더욱더 사업에 몰두하는 것보다 건축 연구자가 되는 길을 선택하여, 어린 시절부터 오래된 건물이나 이국 건물에 관심이 있는거 같아 그는 인도에서 살면서 인도의 건축물을 보고 돌아다니면서, 또 사업보다 연구자 생활이 자기 성격에 잘 맞는다고 판단한 것 같다.
10년에 걸친 캘커타 사업을 끝내고 영국에 돌아와서 런던 론그함 플레이스(Langham Place)에 정착한 후에, 그는 도서관에 다니면서 건축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리고 1834년부터 1843년에 걸쳐 10여년 동안에 반복하여 인도에 가서 건축조사를 하여, 방대한 필드노트를 작성하였다. 인도여행길에 유럽에서 중동에 이르기까지 각지를 여행하였다고 한다. 인도의 어느 지방을 언제 여행하였는지는 기록 상호간에 차이점이 있어서 정확하지 않다
마지막 인도여행은 1845년이지만 그 전인 1843년에 최초의 논문을 쓰고 연말에 왕립 아시아 협회(Royal Asiatic Society of Great Britain and Ireland)에서 발표를 하였다. 이것이 “인도의 석굴 사원론(On the Rock-Cut Temples of India)” 이고 퍼거슨이 35살때의 일이였다.
영국 테일라(Taylor)장군이 산치(Sanchi)불교유적을 발견한 것은 1818년이며, 그 다음 해 사관 존 스미스가 아잔타석굴사원군과 고대 벽화군을 발견한 후 불교 시대의 인도 고고학이 유행하였다. 퍼거슨은 이 발표로 각지 석굴사원을 처음으로 계통을 갖추어 소개하고 논하였기 때문에 그는 인도 건축 연구자로서 영국에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또이 발표는 반향을 일으켜 영국정부는 그 석굴사원의 보존과 아잔타벽화의 묘사를 시작하였다.(*7)
그 이후 퍼거슨은 10년 동안의 축적을 바탕으로 끊임 없이 세계 건축에 관한 자료를 지속적으로 수집,저작으로 정리하여 발표를 하였다. 77살로 죽을 때까지 많은 논문과 책을 세상에 펴냄과 동시에 그것들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하여 끊임 없이 개정증보를 지속하였다.
그 저작체계는 인도에서 유럽까지, 혹은 고대부터 19세기에 이르기까지 너무나 광법위하기 때문에 그 전 내용을 파악하기가 어렵다. 더군다나 퍼거슨의 저작을 참고로 든 많은 책들이 그 기술에 잘못이나 차이점을 포함하여 혼란상태로 빠지고 말았다. 그것들을 전면적으로 정리하기 위하여 필자가 “제임스 퍼거슨 저작연표”를 작성하였다. 그것에 따라 퍼거슨의 저작체계를 설명하고자 한다.
제임스 퍼거슨 저작연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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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퍼거슨의 저작을 네개의 계통으로 분류해본다. 그가 가장 오래동안 탐구한 것은 인도 건축사이므로 이것을 제1 계통이라고 하면 제2는 고대부터 중세까지의 세계 건축사 계통이고, 제3은 근세 즉 르네상스 시대부터 19세기까지의 근세 건축사이다.
그 3계통의 대표작품 “세게 건축사(A History of Architecture in All Countries)”, “인도와 동방의 건축사(History of Indian and Eastern Architecture)”, “근세 양식의 건축사(History of Modern Styles of Architecture)”가 그의 삼대작품으로 가장 많이 사람들에게 알려진 책들이다.
그 이외 저작이나 3 계통에 포함된 것이라도 잡지논문 등은 일괄하여 Miscellaneous(기타)란에 배열하였다. 삼부작은 그의 사망 후에도 개정판이 출판 되었다. 그 중에서도 “인도와 동방의 건축사”는 지금도 인도에서 리프린트가 계속 출판되어 인도 문화 연구자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읽혀지고 있다.
그런데 그의 처녀 출판은 상기한 그의 처음 논문인 “인도의 석굴사원론”을 텍스트로 하여, 실측도를 함께 실은 소형책로서 그의 원화를 기반으로 딥딘(T.C. Dibdin)이 제작한B3판 대형 리트그래프18장을 함께 실어 제작한 “인도의 석굴 사원화집(Illustrations of the Rock-Cut Temples of India)”이라는1845년에 출판된 책이다.
이 책의 서문에 따르면 인도 다른 건축는 달리 석굴사원만을 출판할 의도는 처음에는 없었다고 한다. 본래는 인도 고대에서 근세에 이르는 불교, 힌두, 이슬람 건물을 100장 정도의 리트그래프로 하여 출판할 예정이었다고 밝히고 있어, 그는 처음부터 인도 건축 전체상과 그 주요 작품을 합쳐서 세계에 소개하려고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많은 비용이 들어가기 때문에 우선 석굴사원만을 정리였던 것이였지,독립된 석조 건축보다 석굴사원에 더 깊은 흥미를 가졌던 것은 아니였다.
퍼거슨 원화 “아젠타 제19 굴“
그러므로 다음 출판은 인도 석조건축을 24장의 대형 리트그래프로 하고 70페이지의 해석을 붙인 “인도 고건축의 도화집(圖畵集) (Picturesque Illustrations of
Ancient Architecture in Hindostan) ”이라고 하는 1848년에저서이었는데, 재판이 될 정도로 대호평이었다. 이와 같이 2권의 인도 건축 책이 그의 출발점이 되었지만, 원래 목표는 인도 뿐만 아니라 세계건축 전체를 다루고자 하는 것이었다. 고대에서 근세에 이르는 세계 건축문화를 집대성하면서 그것들의 본질과 상호관련을 고찰한 것이다.
그 시도에 큰 영향을 준 것이 1817년 토마스 릭맨(Thomas Rickman, 1776-1841)이 쓴 “연국 건축양식 판별에 대한 시도(An Attempt to Discriminate the Styles of English Architecture)”이다.
이것은 건축가이며 교회당 건축(敎會堂建築) 연구자인 릭맨이 영국 고딕 건축을, 더욱 자세히 분류하여 “초기 영국식”, “장식식”, “수직식” 들 양식명을 확립하여 각 특징을 분명하게 기술한 책이다. 당연한 것이지만, 건축을 분류하여 시대를 확정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양식”이라는 것을 “과학적으로” 밝히고, 19세기에 있어서의 건축사 기본개념을 “양식”에 두는 것을 결정한 책이었다.
퍼거슨은 이 책에 감명을 받고, 그 양식개념이 영국뿐만 아니라 인도에서는 더욱더 유효하다고 생각하였다.(*8)
퍼거슨 저 “역사적 탐구" 제1권의 톱페이지
퍼거슨이 처음으로 쓴 본격적인 이론서는 1849년 “예술, 특히 건축미에 관한 올바른 원리에 관한역사적 탐구(An Historical Inquiry into the True Principles of Beauty in Art, more Especially with Reference to Atchitecture)”라고 하는 긴 제목의 책이다. (이하 본고에서는 줄여서 “역사적 탐구”라고 함).(*9)
여기서 주목하여야 할 점은 “올바른 원리(True Principles)”라는 말이 사용이 된 것이다. 이것은 오가스타스 웰비 푸긴(Augustus Welby Northmore Pugin, 1812-52)의 영향이었다.
19세기 초에 영국 건축계는 여태까지 지배적이었던 신고전주의 (새로운 건물을 고대 그리스 로마의 건축양식에 따라 설계하는 경향) 에 이의를 제기하는 건축가가 나타났다. 푸긴은 그 대표로서, 그리스도교 건축의 올바른 모습은 고딕 양식에 있으며, 이교 세계의 그리스, 로마 고전 양식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10)
첨단 아치를 기본으로 한 고딕 건축은, 그 복잡한 조형적 표현도 구조적 합리성에 의거하며, 모든 장식은 그것을 방해하지 않고 존재함으로써 그 존재가치가 있고, 그것이 건축의 (올바른 원리)라고 한다.
그가 1841년에 출판한 “그리스도교 건축의 올바른 원리(The True Principles of Pointed or Christian Architecture)”는 19세기의 영국을 중심으로 하는 고딕 리버이벌의 이론적인 기둥이 된 책이며, 퍼거슨은 이 생각에 공감하여 그 ”올바른 원리”라는 말을 빌려온 것이다.
푸긴이나 조지 길버트 스코트 (George Gilbert Scott) (후에 대학 강당과 도서관을 설계함),등의 리바이벌리스트들은 새로운 성당을 고딕양식으로 설계하고 “중세창미(中世贊美)”의 풍조를 영국 건축계에 널리 퍼지게 하였다.
그러나 퍼거슨은 고딕 양식에 대해 아주 좋은 평가를 하면서도 그것을 절대적이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또 현대 건축을 설계해야한다는 생각도 않았다.퍼거슨의 이와 같은 주장에 대해 중세주의자들은 비난을 했기 때문에 그는 후에 “세계건축사”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 )은 원번역자에 의한 보충>
“(유럽의) 중세 예술이 다른 무엇보다 우수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인도의) 아그라나 델리에 있어서의 무갈이나 파탄 황제에 의한 훌륭한 건축작품군에 접하였을 때, 거기에 유럽중세 미술이 (첨탑식 미술조차) 조금도 사용되지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처음으로 동요하였다.
(인도의) 힌두건축들이 첨탑 아치를 사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애초부터 아치라는 것을 아주 사용하지 않고도 얼마나 풍부하고 다양한 건축을 쌓아 올려는지를 보았을 때 (유럽 중세의 우월성이라는) 저의 생각은 더욱 약해졌다.
그리고 (이집트의) 테베스 나 (그리스의) 아테네 유적군을 실지관찰(實地觀察) 할 때 (유럽이나 인도와) 적어도 동등한 아름다움이 사용되었다는 것은 (유럽의) 중세 건축가들의 방법과 전연 다른 방법으로 얻었다는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기에 이르러 나는 원래 가지고 있던 생각을 떨쳐 버렸다.
이러한 광범위한 실지조사 후에는 건축미(美)라는 것은 첨탑이나 반원형 아치에 있는 것도 아니고, 완목 상태 주두(柱頭)나 평방 때문이 아니라, 사려 깊은 디자인이나 지적이고 우미한 디테일 때문이라는 것을 쉽게 알게 되었다.
나는 어떤 형태도 그 자체가 다른 형태보다 우수한 것은 없고, 또 여러 경우에서 그것이 적용된 목적에 가장 적절한 형태가 가장 좋다는 것을 확신하였다.” (*11)
퍼거슨은 푸긴과 같이 고딕 양식을 높이 평가하였지만, 중세는 사회 시스템과 사람들의 감정도 아주 다른 현대 (퍼거슨이 살았던 19세기) 에 있어서 새로운 건물에 옛날 양식을 사용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하였다. 또 세계 여러 곳에는 고딕 양식이 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양식이 있으며 그것들은 그 시대와 그 사회 요구에 가장 맞는 양식이라서 아름답고 가치가 있다고 판단을 하였다. 그 정당성이야말로 “올바른 원리”라고 한 것이다.
인도건축에서부터 시작하면서 세계의 여러 건축을 연구하여 양식 분류와 그 특질을 탐구할수록 그에게는 그러한 건축관이 생기고, 그것을 체계로 세워 이론적인 저작을 세상에 펴내려고 하였다. 그것이 상기의 “역사적인 탐구”이다.
그러나 세상의 조류에 역행하는 독자적인 건축사상을 나타내는 책을 상업적으로 출판해주는 곳이 없었기 때문에 롱맨 출판사에서 자비 출판하기로 하였다. 이것은 당초 3권을 구상한 것중에서 제1권이었지만 유감스럼에도 겨우 4권밖에 팔리지 않아서 그는 속간(續刊)을 단념하여 미완의 책이 되었다. 퍼거슨이 41살 때의 일이었다.(*12)
이 “역사적 탐구”에 주목해준 사람은 3대째 출판사를 운영하는 사장으로, 그는 퍼거슨과 나이가 같은 존 머레이라는 사람이었다. 또 그는 일반서부터 학술서까지 푹넓은 출판 활동을 한 사람인데, 세게 건축자료를 탐구, 수집하던 퍼거슨에게 그것을 지리적 순서로 다시 쓸 것을 권하였다.
퍼거슨도 고답적인 이론 저작으로는 세상의 인정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서 존 머레이III(John Murray III)의 조언에 따라 세계 여러나라 건축을, 인도에서부터 시작하여 유럽에 이를까지 “가장 대중적인” 필치로 상세하게 서술하였다. 이것이 퍼거슨이 47살때의 획기적(畫期的)인 저작인 1855년 출판 “도해 세계 건축 핸드북” 상하2권이다.
퍼거슨 저 “도해 세계 건축 핸드북” 톱페이지
원래 제목은 “모든 시대와 나라를 대표하는 여러 건축인 간단 명료하면서 평이한 서술으로 된 도해 건축 핸드북(The Illustrated Handbook of Architecture: Being a Concise and Popular Account of the Different Styles of Architecture Prevailing in All Ages and Countries)” 이라는 긴 제목이기 때문에 본고에서는 이것을 단 핸드북(Handbook)이라고 한다.
여러 세계 건축을 계속하여 분류하고 식물학 린네(Linne)와 비교가 될 정도의 퍼거슨은(*13)이 책에 가능한 많은 도판을 삽입하기로 하였다. 사진 인쇄가 없던 당시에 유행한 횡단면 목판의 정밀한 그림과 도면을 840점이나 제작을 시켰기 때문에 이것은 세계의 다양한 건축 양식을 시각적으로 나타낸 공전의 출판이 되고, 서술의 명쾌함과 더불어 대호평을 얻었다.
재판도 나오고 대륙 및 미국에서도 유포되었으며 일본에서도 “공부(工部)대학교 학과병사규칙” 중에 “...참고로서 퍼거슨의 ‘조가학사 (造家學史-The Illustrated Handbook of Architecture)’...를 들고 있다”(*14) 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일본 건축 학생들도 이것을 구입하였을 것이다.
그 이후 퍼거슨의 거의 모든 책들은 같은 체재로 존 머레이로부터 출판된다.
“핸드북”은 세계 건축을 인도, 중국, 서아시아, 이집트, 그리스, 로마, 페르시아, 이슬람, 순으로 상권에서 다루며, 하권에서는 유럽 중세 건축을 프랑스, 벨기에, 독일, 이테리, 포르투갈, 영국, 북유럽, 순으로 서술하고 마지막에 비잔틴을 다루고 있다. 전체의 반이 유럽을 다루고 있으므로 그가 유럽중심주의자라고 하기 쉽지만 상기의 인용문에서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당시 알 수 있는 범위에서 여러 세계 건축양식을 취급하고자 한 점은 요샛 말로 문화상태주의자였다고 할 수 있다.(*15)
그럼에도 그가 고대 그리스와 중세 유럽 건축을 특히 우수하다고 느꼈던 것 같다라는 것은 어느 저작으로도 알 수 있다. 인도는 주변 나라를 포함하여 17페이지에 걸쳐 서술되어 있고, 아직 충분하지 않았지만 여기에 처음으로 인도 건축이 전체적으로 논술되었다. (표2)
퍼거슨의 원화에 의한 “델리의 금요(金曜) 모스크”
“핸드북” 은 퍼거슨 저서 중에서도 1페이지 당 활자량이 제일 많은 책이며 상하권을 합쳐 1000페이지를 넘은 방대한 것임도 불구하고 “핸드북” 이라는 이름에 대하여 의 구심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존 머레이 가 세계 각지의 가이드북을 “Handbook for Travellers” 시리즈로 출판하고 있었으며,(*16) 그 일권으로서 퍼거슨에 집필을 의뢰하였는데 이것은 가이드북보다 훨씬 학문적인 체제를 갖추었기 때문에 “for travelers” 라는 글을 뻬고 “핸드북” 이라는 이름만 사용하였던 것이다.
퍼거슨은 이책의 서론에 18세기에는 건축 연구가 아마추어에 위한 취미로서의 일이였지만 19세기에 들어와서 비평의 원칙이 세워지고 철학적, 과학적으로 연구가 이루어졌으며 19세기 전반 50년간에 대량의 축적이 이루어져 많이 진보하였다는 것을 서술하고 있다.
그의 미완의 저서 “역사적 탐구”의 에센스라고 할 수 있는 건축론은 33페이지네 걸친 서장에 전재되어 있으며, 우선 “건축의 올바른 원리” 란 무엇인가? 으로부터 설명을 시작하고 있다.(*17)
50년전 유럽에 만연한 것은 그리스, 유럽 형태나 오더의 모방(imitation)이었지만 현재 (19세기 중반) 에서는 중세 디자인의 복제(reproduction)로 이행하였다. 그것은 단순한 패션의 변화며 본질적, 혹은 진실의 예술이 아니다. 우리가 해야되는 것은 이러한 표면적인 것에서 속 깊은 곳으로 들어가 예술의 진실한 정의나 목적을 탐구하는 것이다.
우선 세계사에 있어서 옛날 부터 존재하는 건축의 “두개의 시스템” 을 알고 있어야 된다. 하나는 고대에서 중세까지의 유럽 건축과 유럽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세계 여러 지역의 양식이며 또 종교개혁기(즉 르네상스) 이후 유럽과 그의 영향을 받은 세계 양식이다.
전자의 시스템 건축 예술은 그것이 기대된 목적에 가장 알맞은 쓰기 쉬은 디자인이며, 각부는 용도에 어울린 품위와 장식(ornament)을 가진 동시에 그 장식은 건물의 목적에 맞고 그 구조(construction)에 조화된 표현이다. 더구나 건축가는 그 장식을 최대한 우아(elegant)한 것으로 만들었다. 그것은 고대 이집트나 그리스, 고딕뿐만 아니라 나태한 인도인 사이에서도, 우둔한 티베트나 중국에서도 야만인 멕시코 조차 위대하고 아름다운 건물들이 지속적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이 시스템을 따르면 아무리 거칠고 미개한 인종일지라도 건축면에서 실패하는 일은 없었고, 그러한 올바른 예술(true art)이 널리 퍼지고 있던 시대의 것으로서 아름답지 않은 건물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 후자 (르네상스 이후 유럽과 그 영향을 받은 세계) 시스템의 결과는 아주 다르다. 그것은 이 3세기 이상에 걸쳐 유럽에서 행하여져 건축의 형태나 구조기술에 대하여 보다 많은 지식을 가지고 과학과 예술을 결부시키고, 과거의 어떤 민족보다도 위대한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가능한 사람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는데도 불구하고 완전히 만족할 수 있는 건물, 영원히칭찬받을 수 있는 건물은 하나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많은 건물들은 유례가 없을 정도로 장대하고 풍부하게 장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때의 패션을 따르고 있을 뿐으로 곧 시대에 뒤떨어져진다. 그것은 와관이며 허위기 때문에 영속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 로마의 고전예술을 성립시킨 상황이나 사람들의 감정을 다시 현실의 것으로 할 수 없고, 고딕 예술은 현재와는 전혀 다른 사회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시대의 건물을 복제하는 것은 좋게 보아도 가장 무도회인에 지나지 않는다.
이상이 건축 역사에 대한 퍼거슨의 기본인식이다. 고대와 중세 건축은 세계 어디에서나 “올바른 원리” 에 근거하고 있었으므로 뛰어났지만, 르네상스 이후의 유럽 건축은 과거의 모방에 빠지고 말았으므로 아름답지 않고 유용하지도 않다고 한 것이다.
퍼거슨의 건축과 연구는 차례로 새로운 사실의 발견이나 자료의 입수로 발전하고 고쳐 써져 갔지만 이 기본인식은 평생 바뀌지 않고 계속하여 가졌갔다.
그가 그렇게 같은 시대의 건축가나 건축사가와 전혀 다른 인식을 갖게 된 원인은 그가 인도에 살고 인도건축에서부터 출발하였다는 사실에 기한다. 처음부터 유럽에서 건축을 배우고 있었다면 당시 유럽 건축계의 가치관을 지니게 되었을 것이다. 젊은 때를 인도에서 보내고, 인도 건축으로부터 세계 건축으로 범위를 넓혀 갔을 때에 과거 양식을 차례로 모방하는 근세 유럽 건축에 위화감을 느꼈을 것이다.
아마도 인도 콜로니얼(식민) 건축이 당시는 유럽 고전 주의 건축의 모방이며, 인도 기후풍토나 생활 형식과 아무 관계없이 세워져 있었기 때문에 그것들에 거부감을 가졌을 것이다.
고딕 양식인 카태도랄, 칼카타(Cathedral, Calcutta)
고딕 양식이 올바른 원리에 따른 고도의 양식이라고 인정한 것은 푸긴과 퍼거슨의 공통점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같은 전제로부터 완전히 다른 결론을 인도한 것이다.
푸긴은 새로운 건물에 고딕 양식을 적용시키려고 하였지만, 퍼거슨은 과거 양식의 모방을 결렬하게 비난하였다. 그 자세한 건축이론은 여기에서는 생략해야 하지만 “핸드북” 서장인 “전망(Prospects)” 에서는 대략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18)
과거 양식의 지식이 늘면 느어날 수록 우리들을 묶는 쇠사슬은 강하여져서 새로운 진보나 독창성을 막는다. 한편 건축예술의 가장바닥이고 산문적(散文的)인 토목의 영역에서는 놀랍게 급속한 진보를 하고 있다. 우리들이 같은 진보를 완성시키만 하면 고딕의 카테드랄를 간단하게 없애버리고 우리들 시대와 지성에 어울리는, 더욱더 고귀한 건물로 쉽게 바꿔 놓을 수 있을 것이다. 중세 건축사들은 카테드랄의 노화하고 쇠퇴한 부분을 주저없이 헐고, 아무리 조화되지 않아도 그 시대의 양식으로 개축한 것이다.
퍼거슨은 과격하였다. 르 코르븨지(Le Corbusier)에 “가람이 하얗을 때” 를 희상시키도 하는 이 주장은 1855년 건축사가라는 것보다 20세게의 전위 건축사의 논리다. (*19)
그가 추구하는 것은 과거의 재현이 아니고 “올바른 원리” 의 재건이며 그 전초는 이 책의 출판의4년전에 세워져 있었던 런던 만국박람회의 수정궁(Crystal Palace)에 있었다. 그것은 고딕과 같이 예술의 올바른 양식의 원리가 전면적으로 적용된 위대한 건물이며, 거기에는 가장 목적에 접합한 재료밖에 사용하지 않았고, 필수적이지 않는 것은 어떤 부위에도 없고 다만 각부의 구성과 구조의 표현으로부터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퍼거슨은 여기에서도 만족하지 않았다. 예술은 수정궁과 같은 가설적인 건물이나 맨체스터의 산문적인 창고군이나, 기타 엔지니어에 의한 실용본위의 건물에서는 달성되지 않는다. “올바른 시스템” 으로 저변으로부터 시작하는 것만이, 결국 우리들의 궁정이나 성당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오래 계속된 “잘못된 시스템” 이 지속되고, 나중에 광명이 다시 우리들의 길을 비추어 줄 것이라고 하였다.
핸드북” 이 대상으로 한 건축은 시대적으로는 다만 고대와 중세이었으므로 퍼거슨은 그 속편으로서 근세 세게 건축의 역사를 쓰기로 하였다. 이것이7년후 1862년에 출판된 “근세 양식 건축사(History of the Modern Styles of Architecture)” 이며 이것은 “핸드북 제3권으로 간주하였도 좋고 독립한 저작이라고 간주하여도 좋다고 첫머리에 써 있다. (이하 본고에서는 이것을 “근세 양삭(近世樣式)” 이라고 줄임)
그 내용은 르네상스 이후의 유럽 건축 각국사 및 그 영향을 받은 아시아나 남북 아메리카의 이른바 “서양식 건축(洋風建築)” 의 각국사, 그리고 새로운 건물종별로서의 극장 건축, 마지막에 토목(civil and military engineering)의 발전을 서술하고 있다. 성질상 전체 80%가 유럽으로 충당되어 있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었다.(*20)
전술한 바와 같이 횡단면 목판에 의한 비주얼한 도판이 풍부하게 삽압된 지역별 건축사의 기술은 기록으로서, 자료로서 충분히 유용한 서책이었다.
그러나 앞장(前章)에서 말한 퍼거슨 건축론으로 보면 과거 양식 모방에 빠진 르네상스 이후 건축은 거의 가치가 없을 것이다. 실체로 퍼거슨은 이 책의 출판의도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본서를 집필하는 것은 현재 예술이 빠져 있는 과오(過誤) 시스템을 폭로함으로써 어떠한 개선을 가져올 것을 무엇보다 기대한 것이다. 그것이 성공할지 어떨지는 본서를 읽은 사람들 나름이고, 본서를 숙독함에 따라 근세 건축이 얼마나 과오와 기만으로 가득찬 원칙에 근거하고 있을까, 또 반대로 본서가 취급하고 있는 역사에 앞선 모든 시대와 모든 나라들에 있어 (건축에) 완전함을 가져 오고 있던 것과 같은 길을 가면 쉽게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21)
퍼거슨은 “근세 양식” 에서 “과오의 건축사” 를 집필한 것이다.
세계 어떠한 세계 양식도 그것이 “올바른 원리” 따르기만 하면 서로 우열 관계는 없다. 그러나 교육으로 과거 역사나 양식을 배우고 다만 그 반복을 하게 된 르네상스 이후의 건축사는 과오의 역사인 것이다.
그리고 그 올바르지 않는 원리에 따른 양식이 유럽 이외 제국에 전해지면 그 나라 전통까지 파괴할 것이다. 예를 들어 인도의 경우를 보도록 하자.(*22)
인도에서도 신고전주의(新古典主義) 후에는 고딕 양식 콜로니얼 건축이 지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인도 기후 풍토에 맞지 않는다. 인도에 고딕 성당을 짓는다면 측랑(側廊)을 바같공기로 개방해 쟁반사리를 이중으로 하여 베네치안 브라인드를 설치하거나 여러 개량을 하여야 하는데 리바이벌리스트들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한편 인도인 건설자들은 오더의 뜻도 모르고 지배자에게 종속되어 “가짜 양식”으로 세우고 있다. 그 곳에는 “심미안(審美眼)”이 뒷받침되는 “상식적인 판단력(common-sense)”을 잃었다는 것이다고 한다
인도에서의 “가짜 양식” 견본
그러면 르네상스 이후의 유럽 건축은 왜 “상식인 판단력” 을 잃어 “가짜 건축” 을 만들게 되었을까?
그 답으로서 퍼거슨이 주목한 것이 당시 발흥(勃興)한 민족학 혹은 인종론이었다. 유럽인들이 건축적인 창조력을 잃고 모방하였던 것은 아리아 민족의 성격이 우세하게 되었기 때문이고 원래 아리아인들은 건축적(예술적)인 인종이 아니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에 그는 이끌렸을 것이다.
대항해 시대 이후 유럽인들이 아시아나 미국에 진출하는 것함에 따라 현지의 인간 사회나 종교를 기술하여 출판하게 되어, 이것은 “민족지(ethnography)” 라고 불렀다. 각지의 민족지의 축적이 후에 민족학, 혹은 인류학이라는 과학쪽으로 나간다.
18세게 말에 인도 고전어인 산스크리트어와 고대 그리스어, 라틴어의 문법구조의 유사점이 발견되어 비교언어학의 길이 열리자 인도, 페르시아, 유럽을 묶은 “인도 유럽 어족” 이라는 개념이 나타났다. 그것에 따라 비교 신화학, 비교 종교학도 여명기(黎明期)를 맞아 이것들이 세계 민족이나 인종 분류와 그 상호관계의 탐구로 발전하였다. 퍼거슨이 “핸드북”을 쓴 19세기 중엽(中葉)은 그러한 여러 학문의 개화기(開花期)이었다.
인도 건축에서 출발한 퍼거슨은 그 양식 분류에 대하여 생각하기 시작하였을 때 북인도와 남인도에서 힘두 사원 형태가 명료하게 차이가 있어, 그 것들을 “북인도 양식 ”과 “남인도 양식”으로 나누고, 역시 명료한 차이를 나타내는 북인도 아리아 인종과 남인도 타밀 인종과를 이것에 대응시켜 북힌두 양식은 “아리아 양식”이라고도 불렀다.(*23)
아마도 이것이 줄발점이 되어 세계 건축 기술로 진행하는 과정에서 각지의 민족지를 참조하게 되었다. 건축 기술이 단순한 양식의 나열이라면 그것은 과학이라고 할 수 없다. 각 양식의 특질을 나타내면서 체계가 세우는 것이 필요하고, 그것이 “건축 민족지”이다고 생각하였다.
민족지라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초기이고 퍼거슨은 이 말을 기꺼이 사용하였지만 그것은 민족학이나 인종론과 거의 동일시하였다. 1855년 “핸드북”의 서장에서는 제12절을 “민족지”라고 하여, 그 때는 불과 반페이지의 기술에 지나지 않았는데 거기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우리는 낡은 건물을 보면 그 건설자들이 어떠한 상태의 문명에 살아 있었는지 예술에서 얼마만큼 진보를 하였는지를 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어떠한 인종에 족하는지, 그리고 그들이 인류의 다른 종족과 어떤 친척관계에 있었는지도 거의 대부분 말할 수 있다. 내 지식이 미치는 한 그 원칙에서 벗어난 것은 하나도 없다.
또 내가 보기에는 건축이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언어와 같이 인종을 판단하는 적절한 수단이다고 확신하고 있다. 언어는 변화하고 혼합하므로 한번 변질하면 그 원인을 찾아 구성요소를 푸는 것이 곤란하지만 건물은 한번 건설이 되면 그것이 지어졌던 시대의 변함없는 증거로서 존재하여 건설자들의 감정이나 목적은 언제까지나 그것에 계속 각인이 되는 것이다.”(*24)
퍼거슨 “Nineveh과Persepolis 궁전” 톱페이지
19세기 중반 비교 어학을 추진하여 비교 종교학을 개척하고 있던 것이 인도의 “리그 베다”의 교정본을 간행한 젊은 막스 뮬러(Friedrich Max Muller, 1823-1900)이었다. 언어와 종교, 민족과는 밀접한 대응관계가 있다고 하는 그의 이론을 중심으로 당시 과학적인(이라고 생각된) 수준의 인종분류를 사용하고 퍼거슨은 “근세 양식” 권말에 36페이지에 걸쳐서 “건축의 관점으로부터의 민족학(Ethnology from an Architectural point of view)” 의 장을 쓴다.(*25)
이제 와서는 전혀 이용하지 않는 이론이지만 퍼거슨은 이것을 정말로 명쾌하고 질서 졍연하게 논술하여 건축사의 근저(根底)를 삼으려고 하였다. 그는 이 이론에 상당한 자신을 가지고 있던 것 같고, 후의 “세계 건축사” 에는 약간 수정을 하면서도 거의 그대로 “파트3”으로서 넣어 표제를 “건축 예술에 작용된 민족지(Ethnography as applied to Architectural art)” 라고 하였다. 이것은 그대로 제2판, 제3판에서도 이용되어 많은 사람에게 읽혀졌다.
그 개요는 다음과 같다. 아시아와 유럽 인종 기원은 중앙 아시아에 있으며 거기에서 시대가 지나며4회에 걸친 민족이동이 있었다. 그4대 인종을 투란인(Turanian), 셈인(Semitic), 켈트인(Celtic), 아리아인(Aryan)이라고 불러 인종들의 순수도와 혼혈도가 건축의 성격을 결정한다라는 것이다.
이4대 인종에 대하여 각 종교, 정치, 도덕, 문학, 예술, 과학의 항목을 마련하며 그 특징을 추리하여 단정적으로 기술하였다.
투란인은 제일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인데, 석기 시대의 주민족이고 아시아에서 아프리카로 걸처 넓게 분포하였다. 이집트인, 중국인, 일본인, 멕시코인, 타밀인, 터키인, 마자르인 등이 이에 속한다.
다음에 셈인은 중동 벙면으로 이동하며 악카드인, 아람인, 헤브루인, 아라비아인, 이디오피아인이 이에 속한다.
켈트인들은 청동기(靑銅器)를 도입하여 서유럽에 이주하였다. 철기를 가져온 아리아인들은 제일 늦게 이동하였으므로 유럽, 페르시아와 인도에 침공하여 선주민인 투란인들을 정복, 지배하였다.
가장 예술적인 재능을 발휘하여 위대한 건설을 한 사람은 투란인들이며 고대 이집트나 인도 타밀인 및 무갈조(朝)는 그 전형이다.
셈인들은 투란인들과 달리 절대자로서의 신(神), 조물주(造物主)의 종교를 만들었지만, 건축적으로 그만큼 위대하지 않았다.
그에 비하여 켈트인들은 대종교 (大宗敎)를 만들지 않고 여러 곳에서 혼혈을 하였는데 유럽에서 섬세하고 가치 있는 예술을 육성하였다.
아리아인들은 가장 지적인 인종이었는데도 건축으로서는 최악이었다. 편리성 본위이며 늘 간단하고 안이한 수단에 의지하였다. 다른 사람들가 경쟁하여 건설에 종사할 경우도 건물을 다만 장식적으로 할뿐이고 옛날에 성공한 것을 기꺼이 모방한다. 그들은 건축에 돈도 에너지도 안쓰려고 하는데, 가령 그것들 없이 위대하고 훌륭한 예술은 결코 성취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의 신앙의 비물질성이 건축으로 향하는 것을 방해한 것일지도 모른다. 투란인이나 켈트인이 늘 전례(典禮)를 중시하며 그것에 따라 건설적 웅장(壯麗)함과 미려함을 필요로 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아리아 인종인 페르시아인은 사원(신전)을 가지지 않았다.
그리스인은 아리아 인종이지만 그리스 건축이 위대한 것은 아라아인이 침입하였을 때의 원주민인 투란 인종의 페라스기인과 혼혈한 덕분이다. 유럽에서는 켈트 인종이 우세하였던 시대에 예술이 번영하였지만 아리아 인종 영향이 강하여지자 에술은 쇠퇴하고 말았다 라는 것이다.
아리아인 퍼거슨이 건축 연구에 의하여 이러한 인종관을 확입하였다는 것은 놀랄 것이다. 이것은 아리아인 자기 비판인 것일까? 그러나 여기에는 다른 견해를 보일 여지도 없는 것이 아니다.
그는 퍼거슨이라는 이름이 카리키는대로 순수한 스코틀랜드인 이었기 때문에 그 조상이라고 하는 켈트 문화를 높게 평가하여 근세 건축 쇠퇴의 책임을 아리아인에 전과하려 하지는 않았을까?(*26)
때마침 19세기 중엽 스코틀랜드에서는 영국에 의한 지배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내셔널리즘이 대두하고 있었다. 퍼거슨 마음 깊은 곳에서도 그러한 감정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방대한 세계건축 탐구동기를 그러한 내셔널리즘에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초인적인 업적은 무엇인가? 불가사의한 “건축의 힘” 이 작동하여 타락한 근세 건축을 다시 위대한 높은 곳으로 올리기 위하여 일생을 받쳐 건축사와 건축론의 저작을 계속한 것이다. 유럽이든, 인도든, 모든 세계의 땅에서 그 시대와 민족, 사회 시스템에 적합한 고유 양식이 창조되어야 한다.
퍼거슨 저 “세계 건축사” 하권 초판 톱페이지
“핸드북”을 간행하고 나서 10년 사이에 세계 건축에 관한 새로운 보고나 자료가 계속하여 모임에 따라 퍼거슨은 그것들을 포함한 새로운 판을 만들 필요를 느꼈다. 그때 “핸드북”은 세계 건축을 지리적 순서로 기술하였으므로 이것을 역사적인 순서로 다시 배열, 수정하여 말 그대로 건축사 책으로 하기로 하였다. 이것이 “전 세계 건축 역사를 서술한 첫시도”(*27) 라고 자부한 “세계 건축사 (A History of Architecture in All Countries, from the Earliest Times to the Present Day)” 상하2권이다.
1865년에 상권이 출판이 되고 그 다음해 출판 예정이던 하권이 1867년에 출판이 되어, 퍼거슨은 59세가 되어 있었다. 상하 합쳐서1,500페이지를 넘고 횡단면 목판 도판은 1,180점에 걸친 방대한 책이다. 이중 약 반 정도가 “핸드북” 기술이 그대로 있으며 나머지는 개정 및 증보(增補)인데 퍼거슨 건축사관 자체는 변경이 없고, 중세 건축의 나라별 기술 방법도 “핸드북”을 답습하고 있으므로 “핸드북”이 세상에 나타났을 때처럼 충격은 없다. 전체를 더욱 상세하게 기술하여 치밀화한 것이다.
그러나 “핸드북” 제3권으로 쓰인 “근세 양식”은 이후에 “세계 건축사” 제3권이라고 하여 세계 건축사를 완성시킨 역사가로서 퍼거슨 명성이 높아졌다.
인도는 하권인 “이교(異敎)의 건축(Pagan Architecture)” 제3부부터 제6부에서 다루어지게 되었지만 “핸도북”에서는 주변 나라와 합쳐서 171페이지이었던 것이 288페이지로 늘어나 내용이 많아졌다. (표2)
퍼거슨이 한층 더 의욕을 태운 것은 이 인도와 인도에서부터 동쪽 건축사를 더욱더 정밀화하여 독립시킨 책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1860년에 인도 고고(考古)조사국이 설립되어 알렉산더 카닌감(Alexander Cunningham,1814-93)이 초대 장관이 되자 인도 고고학이 많이 발전하여, 인도의 고유적이나 고건축(古建築) 조사 보고서가 계속하여 간행되어 있었다. 인도에서 출발한 퍼거슨은 이것들 모두를 포함시켜 인도 건축사의 완성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것들을 실현하기 위하여는 그의 세계 건축사 전체를 재(再)구성을 할 필요가 있었다. 우선 “근세 양식”으로부터 민족사의 부분을 삭제하여(이미 “세계 건축사에 옮겨 있었다”) 전반적으로 수정하였다. 1873년에 제2판으로서 간행하자, 이것을 “세계 건축사 제4권으로서” 라고 개명하였다. 그 다음 해에는 “세계 건축사” 제2권으로부터 인도와 동방 부분을 삭제하여 배열을 바꾸고 전체도 개정 증보하여 이것도 제2판으로 삼는다 (세계건축사 제1,2권).
그리고 염원인 “인도와 동방 건축사(History of Indian and Eastern Architecture) (이하 “인도와 동방”이라고 함) 초판을 775페이지의 방대한 책으로서 출판한 것이 2년후인 1876년이고, 이것을 세계 건축사 제3권으로 한 것이다. 이것으로 크게 발전한 그의 건축사3부작이 완성하여 전4권 합쳐서2,600페이지에 달하는 대저작이 된다. 그때 퍼거슨은 68세이었다.
퍼거슨 저 “인도와 동방 건축사” 초판 톱페이지
그의 사후에도 존 머레이로부터 개정판이 출판된다. “인도와 동방(Indian and Eastern)”은Burgess와Spiers에 의하여 개정 증보가 되어 초판으로부터 34년후이 1910년에2권의 책이 되어 그것이 오래동안 인도 건축사의 결정판이 되었다.
제임스 바제스 (James Burgess, 1832-1917) 의 것은 퍼거슨의 오리지널을 최대로 존중하여 그 후의 연구성과를 포함시키면서 여러 곳의 잘못을 정정(訂正)하는 양심적인 것이었는데 개정판은 퍼거슨 자체가 아닌 것으로 주의할 필요가 있다.
“핸드북”으로 시작한 인도 건축사 서술이 “인도와 동방”으로 완전히 체계화가 될 때까지 그 양과 구성이 어떤 추이를 보였는가는 필자가 작성한 “퍼거슨에 의한 인도 건축사의 형성”에서 불 수 있다.
퍼거슨에 의한 인도 건축사의 형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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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상세한 내용을 말할 여유가 없기 때문에 그가 어떻게 하여 인도의 양식 분류를 만들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말하여야 하는 것은 19세기에는 아직 인더스 문명의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으므로 누가 그문명을 이끌어 갔는가라는 20세기의 난문(難問)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라는 것이다.
처음으로 썻던 “핸드북”에서는 전에 말하였듯 남인도 타밀인과 북인도 아리아인과의 인종 구별을 하였다.(*28) “세계 건축사”에서는 인도 “민족지” 무렵에 인도에는 현재 산악 부족과 비슷한 선주민이 있었는데 거기에 처음으로 이주한 사람은 타밀어를 사용하는 드라비다인이고, 다음으로 이주한 사람은 산스크리트어를 사용하는 아리아인이었다고 하여, 여기서 처음으로 드라비다 민족이라는 말을 사용한다.(*29)
그러나 이후에 인종보다 종교 구별을 중시한 기술이 된 것은 현지 건축 조사로부터의 요청이었다. 즉 다수 종교가 혼재하는 인도에서는 인종 구별만으로도 건축 양식을 규정하는 것이 어렵고, 종교 구별에 의지할 필요가 있다.
인도에서 번영한 종교에는 고대에서는 불교, 중세에서는 자이나교와 힌두교, 그리고 근세의 이슬람교가 있고, 종교마다 다른 양식을 사용하였다고 하여 “핸드북” 이래 인도 건축을 종교별로 저술하였다. 이것을 어떻게 하여 인종론으로 결부시키는지가 퍼거슨의 과제이었다.
아리아인에 관하여만은 “근세 양식” 에 있는 “민족지”의 단계에서 결론이 나와 있었다. 그들은 비건축적 민족이기 때문에 “베다”의 종교를 만들었지만 건물은 고대에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중세 건축 양식 분류는 가장 문제가 많고 “세계 건축사” 단계에서는 “핸드북” 과 반대로 북쪽 힌두식으로 아리아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남쪽 힌두적으로 “드라비다 양식”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제3양식으로서 처음으로 “찰루키아 혹은 라지프트 양식(Chalukya or Rajpoot Styles) 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데 여기서는 서인도 찰루키아 왕조(소란키 왕조)와 데칸 지방 찰루키아 왕조를 결부하여 버렸다. 이것은 “인도와 동방”에서 많이 정정된다.
퍼거슨의 인종론이 인도에서 작용되어 “인도와 동방” 서장에서 상세히 논하였는데 그전에 마지막으로 그가 채용한 인도 양식 분류 및 그룹을 본문에 따라 간단하게 설명하고자 한다.
우선 고대에서는 거의 불교 유적 밖에 안남았기 때문에 제1부는 불교 건축이다. 불교의 형제 종교인 자이나교 건물은 제2부에서 취급하였다. 이것이 중세가 되어 세상에 나왔는데 초기에는 불교 건축과 동형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제3부에서는 인도 평원부과 다른 양식인 히말라야 지방 건축을 취급한다.
그 다음에 인도 건축사 중심이 된 중세 힌두 건축에 대하여 논하는데 그때까지의 시행착오를 정리하여3개 이름으로 확입하였다. 우선 제4부에서는 남부의 “드라비다 양식(Dravidian style)”, 제5부에서는 중부의 “찰루키아 양식(Chalkyan style)”, 그리고 제6부에서는 북부의 “인도 아리아 양식(Indo-Aryan style)”이다.
13세게 이후에는 외래 이슬람 건축(당시는 사라센 건축이라고 하였다) 가 번성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제7부에서 취급한다. 거기에서는 델리 술탄 왕조 시대 건축을 “파탄 양식(Pathan style)”이라고 하여 무갈조 시대의 건축과 구별하고, 더군다나 각 지방 양식으로서 순서대로 논하고 있다.
제8부는 인도의 동쪽에 위치한 버마, 샴, 자바, 캄보디아에 관한 것이다.
인도 아리아 양식, 찰루키아 양식, 드라비다 양식의 구분 지도
그런데 인도에서 출발한 퍼거슨의 인종과 건축 관계론은 세계 건축사로 인류사적으로 발전한 후 다시 인도로 돌아온다.(*30) “베다(Veda)”나 “마라하바라타(Mahabharata)” 기술을 근거로 한 신화적인 부분은 생략하여 각 인종의 보다 구체적인 성격의 정의부터 보고자 한다.
드라비다인은 투란 인종에 속한다고 하는데 이것이 이주민인지 남방 기원 토착민이지는 확실하지 않다. 가령 이주민이라고 하여도 그 기원은 중앙아시아가 아니라 남쪽 바빌로니아 방면이 아닐까 한다.
드라비다인은 아리아인에 비하여 지적으로 뒤떨어지지만 순수한 혈통과 민족성을 유지하였다. 투란 인종이기 때무에 중세에 위대한 사원 건축을 발전시켰으므로 이것은 “드라비다 양식”이라고 부른다.
드라비다 양식인 사원 형태(Brihadishwara Temple)
한편 아리아인들은 칼리 유가 원년(BC 3101년)쯤에 인도에 이주하여 왔는데(*31) , 그 이종적 순수성은 점자 없어지고 토착민과 혼합하였다.
아리아인이 불교를 만들었는데 그 신자가 되어 불교를 유포시켜 스투파나 석굴사원을 축조한 사람은 순수한 아리아인이 아니라 투란인과의 혼합 종족이었다. 또, 힌두교도 아리아인이 베다 종교로서 시작하였지만 (바라문교 시대) 건축적 성과를 낳는 것은 이 때보다 훨씬 후(그프다 왕조 시대) 아리아인과 투란인의 혼혈 종족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퍼거슨은 세계 건축사에서 확립한 시대 인종의 성격적 정의를 인도에 적용하였다.
그렇다면 과연 인도에 토착한 것은 어떤 투란 인종이었을까? 당시 민속 학자 사이에서도 그 이름이 확정되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미 퍼거슨은 산치나 아마라바티의 스투파 및 조각을 연구한 1868년의 “수목(樹木)과 사신(蛇神)의 신앙(Tree and Serpent Worship)”에서 “다스유인(Dasyus)”의 이름을 내걸고 산치와 기타 릴리프 조각에 그려져 있는 사람들이 “다스유인”들일 것이다고 추측하였다.(*32)
다스유인 혹은 다사인이라는 이름은 “리그 베다”에 나오는 것이며 아리아인이 정복한 선주민에 대한 호칭이다. 그들은 검은 피부를 가지고 코가 낮은 인종이며 “풀” 이라고 하는 성(城塞)에 살고 의미불명한 말을 하는 사람들으로서 그려져 있다. 퍼거슨은 이것을 선주 투란 인종이다고 하여 후에 불교를 처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였다.
다스유인은 투란 인종이기 때문에 건축적인 민족이다. 그들이 북쪽 인도에 만든 힌두 사원은 밑에 그림처럼 방형의 평면 위에 포탄 모양의 고탑을 만들었다. 그리고 비예술적인 아리아인은 이것에 그다지 기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건축 양식의 올바른 이름은 새로운 이름이 허락이 된다면 “인도 아리아 양식” 보다 “다스유 양식”이라고 하여야 한다고 하였다.(*33)
다스유 양식의 사원 형태(바라카르의 칼리사원)
퍼거슨의 “인도 건축사”라고 하면 누구나 “인도와 동방”을 바제스가 개정한 제2판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이 “다스유 양식”이라는 말에 대하여 놀랄 것이다.
실은 초판에 있던 이 기술을 바제스가 개정판에서 삭제하였기 때문이다. 퍼거슨 후계자이고, 고고 조사국 제2대 장관을 지내고 고고학과 건축사 연구를 추진한 바제스이지만 20세기 초에 퍼거슨의 개정판을 만들 때 “인도 아리아 양식” 보다 “다스유 양식”이라는 호칭이 마땅하다라는 퍼거슨 의견은 삭제해야 한다고 한 것 같다.
그런데 퍼거슨은 인도 건축 양식을 “인도 아리아 양식(혹은 다스유 양식)”과 “드라비다 양식”이라는 인종명으로 불렀는데 양쪽 중간에 위치한 중부 인도 지역에서 발전한 양식에 마땅한 인종명을 찾아 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중세에 그곳에서 가장 부흥한 왕조 이름을 사용하여 “찰루키아 양식”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민족명과 왕조명을 혼재시키고 말았던 것이 결국 일관성이 부족하다고 후에 비판을 받게 되었다. 퍼거슨이 “찰루키아 양식”으로 분류한 지역은 실제로는 찰루키아왕조 뿐만 아니라 많은 다른 왕조도 건축물을 축조하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하여 종교와 지리를 짜맞추며 인도 건축 전체를 처음으로 체계화한 퍼거슨의 인도 건축사는 바제스의 개정으로 인하여 더욱더 견고하게 되어 인도 건축 연구상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후에 미술 건축사가인 퍼시 브라운(Percy Brown, 1872-1955)이 출판한 “인도 건축사(Indian Architecture)”(1942년) 상하2권은 그 후의 성과를 반영한 상세함에 의하여 인도 건축사의 교과서적인 입장을 퍼거슨으로부터 빼앗았지만 그 내용은 완전히 퍼거슨 체계의 연장상에 있으며 양식 분류명도 거의 모두가 퍼거슨의 답습이었다. 더구나 그의 “민족지”에 대한 기술이 없어서 퍼거슨 저술 66년후에도 그러한 양식명을 채용한 근거가 분명하지 않다.
퍼거슨의 분류와 명명법을 철저하게 비판한 사람은 영국 미술사가 E.B.하벨(Ernest Binfield Havell, 1861-1934)이다. 그는 오카쿠라텐신(岡倉天心)과 같은 시대에 살았으며 캘커타 미술학교 교장으로 근무하였을 때에 텐신의 미술운동과 가까운 입장에서 인도 정통미술 복권을 시도하였다. 그것은 인도 미술의 “만세 일계설(萬世一系說)”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종교, 인종별에 의한 건축 양식 차이를 강조하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다고 하여 퍼거슨을 비판하였다.
그런데 하벨은 만년인 1928년에 미술사를 중심으로 한 인도사 “아리아인에 의한 인도 통치의 역사(The History of Aryan Rule in India)”를 쓴다. 거기서는 인도를 고대에서 현대까지 통치한 것은 늘 아리아인과 그곳에서 파생한 원리라고 하여 인도 아리아인 이주로부터 무갈조의 악발 황제(皇帝)까지의 문화사를 “아리아 사관”으로 기술하여 그것으로 영국인에 의한 인도 지배를 긍정한 것이다.
이것도 역시 퍼거슨이 아리아인을 비예술적인 민족으로서 폄하한 것에 대한 대항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퍼거슨의 순수한 인종론 으로부터 나치스의 차별적 인종론으로 흘러 간 추세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퍼거슨은 민족학자가 아니었다. 그의 건축사 연구에 골격을 주기 위하여 당시 민족지나 인종론을 응용한 것 뿐이었다. 그렇게 하여 명명된 양식명은 현재 인도 건축사에서 정식으로 이용하는 것은 거의 없다.
그러나 그의 저작은 영향이 너무 커서 그들은 지금도 인도 일반사회에 유통하고 있고 P.브라운이 답습하였으므로 전문가들도 자꾸 퍼거슨 분류 방식으로 인도 건축을 보는 것이다.
( 「 ジェイムズ・ファーガスンと インド建築 」、2001年春 執筆、
『 建築史家たちの アジア発見 』 風響社 所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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