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THE ADINATHA TEMPLE AT RANAKPUR
라나크푸르의 아디나타 사원

가미야 다케오


아디나타 사원 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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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나크푸르 사원의 매력

 「이것이야말로 인도건축의 최고 걸작이다!」 3개월간의 인도 여행도 종반이 가까이 되어 아부산에서 기차와 버스를 이어 타고 깊은 산속의 작은 마을 라나크푸르에 다다라 홀연히 서 있는 뾰족한 자이나 사원을 처음 보고 흥분 중에 사원 내를 돌아다니면서 그렇게 확신하였다. 동인도에서 시작된 건축순례의 여행으로 북인도, 남인도를 돌면서 힌두나 이슬람의 수많은 걸작에 압도되었지만, 그래도 특히 깊은 감명을 받음과 동시에 여행의 하이라이트가 된 것이 초대 티르탄카라인 아디나타에게 바쳐진 이 사원이었다.

 이러한 걸작이 대도시도 아니고 유명한 관광지도 아니고 도심에서 떨어져 교통이 불편한 산속 깊이 있다고 하는 것은 실로 이상한 것이었다. 당시는 아직 여행자 ·방갈로도 없었고, 단지 이 대사원과 몇 개의 소사원 외에는 <다르마샤라>라고 불리는 순례자의 숙소가 있었을 뿐이었다.

 그로부터 9년씩 사이를 두고 3번 방문하였지만 그 때 그 때마다 새로운 감동을 느끼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건축과 조각과 공예와의 행복한 결합, 변화가 풍부한 공간체험, 단백색의 순수한 아름다움, 섬세하기 짝이 없는 돔천장을 받치는 높은 기둥이 만드는 개방된 공간의 정토감각, 그 이외에 필설로는 다 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바로 이것을 두고 하는 말하는 것이다. 최초의 방문 이래 왜 이러한 사원이 탄생하게 된 것인가를 조사하1 감에 따라 점점 더 이 사원의 매력에 빠져버렸다.

도면1. 라나크푸르의 아디나타 사원 평면도 15세기, 출전: Jeorge Michell : The Penguin Guide to the Monuments of India, vol. 1, Buddhist, Jain, Hindu, 1989.
중앙부의 본당을 <무라·프라사다>, 그 내부를 <가르바그리하>(성실), 본존을 <무라나야카>라고 한다. 아부산의 경우와는 달리 차투르무카 형식의 경우에는 <구다·만다파>(예배당), <트리카·만다파>(전실)이 없고 사방의 문 앞에 바로 4개의 <란가·만다파>(A 회당)이 면하며 또한 그 앞에 3층의 개방된 공간인 <메가나다·만다파>(B 고당(高堂))이 이어진다.
본당의 대각선 상의 사방에는 두 방향으로 개방된 <마하다라·프라사다>(이면당)이 있고 전체로서는 <판차야타나(Pancha-yatana)>(5당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 외에 남북에 2개씩 <바드라·프라사다>(측당)이 있어 전체의 구성을 복잡하게 하고 있다. 외주부에는 <바마티>(주변 회랑)에 면하여 <데바크리카>(소사당)이 한 줄로 서 있다. 이들 모든 사당에는 티르탄카라상(지나상)이 안치되어 숭배되고 있어(사면당에는 4개, 이면당에는 2개), 전부 100개를 넘는다.

 사원은 대규모로서(도면1), 전체가 60m × 62m(*1)의 넓이이고 마치 요새와 같은 기단의 위에 서있고 중앙의 입구 계단 위에는 3층의 <바라나카>(엔트런스·홀)이 돔지붕을 받치고 있다. 전장에서 설명한 바와 같은 방어를 위한 형태로서 입구의 문은 다소 작다. 여기를 지나 여전히 어두운 계단을 오르면 갑자기 밝고 넓은 하늘이 극적으로 나타나 그 화려함에 자기도 모르게 숨을 삼킨다.

아디나타 사원, 메가나다·만다파를 올려 다 본 모습

 빼곡히 늘어선 일단의 기둥은 섬세하게 조각되고 동일한 패턴의 조각을 한 기둥은 하나도 없다. 그리고 2층, 3층으로 개방된 공간에 높고 낮은 큰 돔 또는 작은 돔이 가설되고, 그 돔천장의 조각이 또한 대단한 밀도를 자랑한다. 높고 낮은 천장의 사이나 중정으로부터는 빛이 넘쳐 흘러 서로 얽힌 공간과 지천인 정교한 조각을 눈에 띄게 한다. 화려하다고 하더라도, 바닥에서 천장까지의 일체가 백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그것은 실로 청정한 화려함이며, 이것도 또한 정토 세계의 발현인 것이다.

 내부를 걷다 보면 다음에서 다음으로 이어지는 변화가 풍부한 비스타가 전개되어 아무리 사진을 찍어도 다 찍을 수 없을 정도이다. 그것은 마치 바하의 『푸가의 기법』이 결정화한 것과 같으며, 이 정도의 풍요로운 공간체험은 인도 어디에서도 할 수가 없다. 건축적인 인상이 가장 가까운 예를 생각해 본다면, 프랑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의 중기의 『에니스 저택』과 『제국호텔』일 것이다.

 그 두 작품은 독특한 콘크리트·블록이나 테라코타 그리고 오야석이 섬세한 조각요소가 되어 연속적인 반복과 전개를 통하여 복잡하게 얽혀 흘러 가는 일종의 비현실적인 공간구성의 매력을 만들고 있다. 그리고 라나크푸르에서는 외주벽 이외에 내외를 가르는 벽이 거의 없기 때문에 공간의 유동성이 한층 더 깊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사원을 설계한 데파카라고 하는 사람은 천재적인 건축가이었음이 틀림 없다. 이 정도의 통일된 거대한 건물이 단순한 직공들의 기술의 집합으로 만들어졌다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하나의 확고한 구상력과 미의식이 일관하지 않으면 이러한 걸작은 실현되지 않았을 것이다.

건축가·데파카의 상

자이나 건축의 종합적 성격

 이 건축작품은 미술사가로부터는 과소평가되어 있다고 생각되는데, 그 이유는 개개의 조각을 독립적으로 바라 볼 때에는 힌두의 사원보다도 뒤떨어진다고 하는 점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이나 건축에 있어서는 조각은 독립가치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고, 엄청난 조각이 전부 건축요소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으면서 전체적인 건축공간에 기여하는 것이다(그것이 또한 라이트의 건축을 방불케 하는 점이다). 다음에 시카라를 비롯한 건축요소의 대개가 힌두 건축과 공통적으로서 자기의 독자적인 것을 나타내고 있지 않다고 하는 점에 있다.

 그것은 확실히 약점이기는 하지만, 자이나가 여기에 도달한 독자적인 가치는 그 「종합성」에 있다.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약간은 독단적이지만 건축이라는 것을 크고 3개로 분류하지 않으면 않된다.

사면당 형식의 시카라, 아디나타 사원

 우선 제1은 「조각적(彫刻的) 건축」이다. 아마 힌두를 비롯한 인도건축의 본질은 조각성에 있는데, 세부조각의 풍부함은 물론 건물 전체가 한 개의 조각작품과 같은 성향을 나타내는 것이 많다. 이것을 「덩어리적 건축」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제2는 이것과는 대조적인 「피막적(皮膜的) 건축」으로서 외관의 조각성보다도 내부공간을 덮어 씌우고 둘러싸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생각한다. 중동의 이슬람건축이 그 대표라고 하여도 좋다. 이슬람건축에는 중요한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거리의 집들에 파묻혀 버리고 말아 파사드(Façade;정면)이라는 것이 없고, 단지 내부로 들어가면 거기에는 멋있는 공간이 있는 예가 많이 있다.

 제3은 「골조적(骨組的) 건축」으로서, 이것은 일본의 건축을 비롯한 목조건축을 상상하면 좋다. 조각성도 희박하고 근대적인 공간성도 모자란다. 거기에 있는 것은 장소의 설정과 가구(架構)의 매력으로서 내부와 외부는 분명히 구별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모든 건물을 이러한 3종류의 건축술(architecture)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다시 라나크푸르의 아디나타 사원을 보면, 그러한 3종류의 건축술이 종합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반의 힌두사원이 외관은 버젓한데 내부에 들어 가면 그 빈약한 공간에 실망하는 경우가 많은데 반하여, 여기는 멋있는 공간의 연속이다. 반대로 아부산의 자이나 사원은 내부의 매력에 비하여 외관이 초라한 건축이지만, 여기에는 외관이나 본당 시카라 등의 조각적 매력도 구비하고 있다.

 또한 사원 전체의 구조는 석조임에도 불구하고 축조적(軸組的)으로서, 이것은 인도건축의 목조적 기원을 잘 나타내고 있다. 구조는 어디까지나 기둥과 보의 가구로서 벽이나 아치가 아니다(돔도 또한 이슬람의 돔이 아니라 인도식 적조구조의 돔이다). 이렇게 3종류의 건축술이 혼연일체가 된 종합성이야말로 아직 힌두건축이 도달하지 못했던 지점에까지 이 사원을 승화시킨 것이다.

서메가나다·만다파에서 안쪽을 본 모습


자이나 사원의 의미

 그러면 그러한 종합성을 자이나 건축이 획득할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이야말로 지금까지도 종종 등장한 <차투르무카>(사면당) 형식인 것이다. 라나크푸르의 사원의 중앙부를, 아부산의 델와라 사원군 중에서 다른 것과는 틀린 평면 모양을 하고 있었던 카라타라 사원의 평면(제1장 참조)과 비교하여 보면, 양자가 똑같은 것을 금방 알아차릴 것이다. 거기서는 중앙 사당이 사방으로 개방되어 있어 각각의 전면에 돔천장의 <만다파>(홀)를 구비하고 있다.

 그런데 힌두사원의 기본형식은 <성실 + 만다파>로서 성실(가르바그리하)는 항상 전면에만 문을 가지니까, 사방에 만다파를 구비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힌두사원에 있어서의 <가르바그리하>(*2)라 함은 「신의 주거」인 것이고, 보통의 집과 같이 문단속을 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낮에는 신상에 식사가 바쳐지고 오일·램프의 빛으로 비추어지지만, 밤에는 거기서 신이 잘 수 있도록 문이 닫혀진다.

   

사마바사라나 における マハーヴィーラ
( from "Kalpa-Sutra" c. 1475-1500, Detroit Institute of Art )
ジナが全智になると、インドラ神が 彼のために 説教場としての 사마바사라나 を用意する。 
四方に開かれた사마바사라나は、円形の場合もあれば 矩形の場合もある。

 이에 대하여 자이나 사원이라고 하는 것은 신의 주거가 아니고 <티르탄카라>(조사, 지나)가 가르침을 설파하는 장소인 것이다. 그것을 <사마바사라나>라고 부르는데, 지나의 가르침을 사방(四方, 세계)에 설파하지 않으면 않되는 것이다. 자이나교의 본존형식에서 특징적인 것은 종종 4개의 티르탄카라상(입상 혹은 좌상)이 등을 맞대고 있는 것으로서 이것을 <차움카> 또는 <차투르무카>(사면)상 이라고 부른다. 이 차투르무카상을 본존으로 한 경우에 그 성실(가르바그리하)도 또한 사방이 개방되어 각 면에 예배당임과 동시에 설교장인 <만다파>를 구비하게 된다.

아디나타 사원, 서란가·만다파

 자이나교의 차투르무카상은 3세기의 것이 마투라에서 출토되는 등 옛날부터 「사면당」이 세워져 있었던 것 같지만 그것들은 현존하고 있지 않다. 사원의 주류는, 힌두를 모방한 <성실 + 만다파>로서 중세가 되면서 사면당 형식이 점차로 독자적인 전개를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힌두사원은 사방으로 넓어질 수 없기 때문에 사원이 대규모화하는 경우에는 집(堂)의 수를 늘리게 된다. 예를 들면 부바네슈와르의 거대한 린가라자 사원이나 프리의 자간나타 사원에서는 <성실 + 만다파>의 전방에 또한 2개의 큰 집을 부가하여 일직선으로 늘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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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garaja Temple, Bhubaneshwar____Pancha-yatana type temple, Sinnar

 또 하나의 방법은 본당 사원의 대각선 상의 사방에 4개의 소사당을 세우는 것이 있는데, 이 전체를 <판차야타나>(5당 형식)라고 부른다. 이것은 힌두에 한정되지 않고 불교나 자이나교에서도 널리 실행된 것으로서, 실은 이 라나크푸르의 사원도 일종의 「5당 형식」을 취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이들 대각선 상의 4개의 사당이 「이면당」 형식을 취하고, 또한 남북 양단에 4개의 「측당」을 부가하여 외주를 86개의 소사당으로 둘러쌓아 가람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힌두의 「5당 형식」과 다른 것은, 마치 아부산의 <무라·프라사다>(중앙사당)의 전방에 <란가·만다파>를 만들어 주변 회랑과 연결시켜 단숨에 전체를 인테리어화 했던 것 같이, 여기에서도 이들 모든 요소가 돔천장을 받치는 만다파군에 의해서 연결되어 몇개의 중정을 에워싸면서 전체가 하나의 계속되는 인테리어 공간이 되게 한 것이다. 말하자면 이 사원은 전통적인 인도건축의 모든 요소의 집대성으로서 또한 그것을 대단히 높은 완성의 경지까지 승화시킨 것이다.

아디나타 사원의 서측정면


차투르무카 형식의 발전

 기록에 의하면 라나크푸르 사원의 직접적인 모델이 된 「사면당」형식의 대사원이 싯다프라(*3)에 있었는데 <라자·비하라>(왕의 승원)라고 부르고 있었다. 아타깝게도 이것은 파괴되고 말아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라나크푸르 사원은 소란키 왕조의 라나·쿤바왕 치세인 1439년에 다라나·샤가 기부하였다(*4).

 비문에 의하면 설계를 하도록 명령 받은 건축가 데파카는, 「저는 샤스트라에 따라 웅대한 사원을 만들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샤스트라>라고 하는 것은 『바스투·샤스트라』나 『실파·샤스트라』 등의 건축 기예서를 가르키는 것으로서 일본의 「기와리(木割り)」라는 책과 유사하다. 예로부터 각지에서 여러가지의 바스투·샤스트라가 쓰여졌는데 서인도에서는 『브리크샤르나바』라는 이론서(샤스트라)가 자이나 사원의 「차투르무카 형식」에 대하여 상세한 해설을 하고 있다. 그 기술에 의거하여 P·O·소마푸라(Somapura)가 그린 배치도가 있는데, 이것은 자이나 사원의 이상적인 평면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도면2).

도면2. 자이나 사원의 이상적적인 평면도(P.O.소마프라의 도면에 의거)
기본적으로는 「5당 형식」을 외주부의 회랑이 둘러싸는 구성인데, 라나크푸르와 같이 전체가 연속하여 일체화되어 있다. 5당은 전부 <차투르무카>이고 그 사방에 각각 <란가·만다파>를 구비한다. 5당을 묶는 직교축 상에는 또한 큰 <메가나다·만다파>가 있고 사방의 엔트런스·홀(바라나카)에 연속해 있다.
외주부에는 4개의 이면당과 8개의 측당이 있고, 그 사이에 92개의 소사당이 나란히 서 있다. 티르탄카라상의 합계는 1층에만 124개가 된다.
모든 사당의 위에는 <시카라>(탑 모양의 지붕)과 깃대를 구비하고, <만다파>의 위에는 돔지붕이나 <삼바라나 지붕>이 가설된다. 보통의 스팬의 경우에 전체의 규모는 대각선의 길이가 약100 m로서 앙코르와트의 제2회랑과 거의 같다.

 이 이상적인 배치는 라나크푸르의 사원을 더 대규모로 한 형태를 취하는데, 보통의 스팬의 경우에 전체로서 대각선의 길이가 약100m가 되는 장대한 규모의 사원이 된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차투르무카 형식」인 것은 말할 나위가 없는데, 이 평면도는 일종의 <만다라>로서 불교의 만다라와 같이 하나의 우주관의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정도의 대규모의 만다라적 사원은 인도에서는 아직 세워진 일이 없었다. 그것이 실현된 곳은 오히려 인도의 영향을 받은 동남아시아에서이다.

로로·존그랑(Loro Jongrang) 사원, 자바, 인도네시아

 동남 아시아에서는 자바(인도네시아)의 보로부두르나 로로·존그랑, 크메르(캄보디아)의 프놈·바켄에서 바욘에 이르기까지 장대한 사원의 조영이 이루어졌다. 그렇지만 단지 평면적인 경내의 넓이 뿐만 아니라 건축적으로 라나크푸르 내지 자이나의 이상적인 배치와 비교할 수 있는 것은, 11∼12 세기에 세워진 앙코르와트이다.

도면3.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평면도 12세기, 출전: Guy Nafilyan : Angkor Vat, 1969, Ecole Francaise d' Extreme Orient
제2회랑으로부터 내측의 도면인데, 그 밖같쪽에 더 큰 제1회랑이 있다. 사원 전체로서는 메르산을 모방하고 있기 때문에 중앙부는 제2회랑과 분리되고 13m 정도의 높이이다. 따라서 공간적으로 연속하고 있는 것은 중앙사당과 제3회랑 뿐이다. 기본적으로는 5당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5당을 연결하는 것은 직선적인 복도로서, <만다파>(홀)이 아닌 것이 자이나 사원과 크게 다른 점이다.

 (도면3)에 나타나 있는 것은 앙코르와트의 제2회랑으로부터 내측으로서, 그 밖깥쪽에는 제1회랑이 있다. 제2회랑의 규모는 약100m × 120m(*5)이고, 그 구성은 자이나의 이상적인 배치와 많이 닮았다. 게다가 앙코르와트의 중앙사당도 또한 사면당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즉, 사방으로 넓어지는 대규모의 사원계획에서는 그 본당이 차투르무카적일 것이 필연적으로 요청된다.

 그런데 자이나의 「사면당」과 앙코르와트의 사이의 가교역할을 한 것이 현재의 방글라데시의 파하르푸르에 폐허로 남아 있는 불교사원인 8∼9세기에 건립된 소마푸라·비하라이다(*6). 이것은 300m × 300m 정도의 광대한 경내의 중앙에 우뚝 솟아 있는 사원으로서 틀림없는 사면당이다.

도면 4.Plan of the SOMAPURA MAHAVIHARA
Plan and its Schematic Plan Paharpur, Bangladesh, 8-9th century.
( from Nazimunddin Ahmed : DISCOVER THE MONUMENTS OF BANGLADESH, 1984, Dhaka)


Map of Southeast Asia

 어찌된 일인지 불교는 자이나교의 영향을 받아 <차투르무카상>을 만들기 시작한 것 같고, 오래된 것으로서는 7세기의 것이 불교의 성지 보드가야에서 출토되고 있다(네팔에서는 더 일찍부터 만들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파하르푸르 지방에는 원래 자이나 사원이 있었던 것 같다. 이렇게 하여 인도의 불교사원으로서 유일한 예인 파하르푸르를 통해서 사면당 형식이 동남아시아에도 전파되었다. 그것이 크메르나 자바의 만다라적인 대가람의 배치로 발전된 것이다.

아디나타 사원, 서만다파 지붕

 인도의 힌두사원은 「사면당」을 발전시킨 일이 없었지만(*7), 이슬람 시대가 되어 무갈왕조의 묘원건축이 「차투르무카 형식」을 취하는 경우가 많았다. 인도의 이슬람 건축의 원류는 페르시아에 둘러싸며 마주보는 4개의 <이완(Iwan)>(큰 아치 개구에 연속하는 반외부공간)을 서로 등을 마주하도록 하여 외향의 「사면당」으로 반전시켜 버린 것이다.

 이러한 것을 보면 자이나교가 만들어 낸 사면당 형식은 인도권을 통하여 아주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그 예는 헤아릴 수 없으나, 그 사면당 배치에 의하여 만들어진 공간의 풍부함을 비교할 때에 라나크푸르의 사원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없을 것 같다.

 예를 들면 앙코르와트(도면3)는 평면이야말로 크지만, 제1회랑, 제2회랑이 모두 중앙부와는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공간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은 최상부에 있는 제3회랑과 중앙사당 뿐이다. 이것은 라나크푸르와 같이 5당형식(판차야타나)을 이어 붙여 연속체로 하고 있지만, 돔천장을 받치는 큰 만다파에 대한 개념이 없고 5당은 단지 직선적인 복도로 연결되어 있는 것에 불과하다. 공간적인 매력에 있어서 다소 모자란다고 하는 점에서는 무갈왕조의 묘원과 유사하다. 그것은 이슬람 건축이면서도 인도화하여 「조각적(彫刻的) 건축」이 되어 버린 것이다.

아디나타 사원, 메가나다·만다파 기둥


상대주의와 사면당

 이러한 「사면당(차투르무카) 형식」을 자이나교가 특별히 발전시킨 것은 무슨 이유일까? 이러한 질문에 대한 완전한 대답이라는 것은 없는 것이므로 그 종교적 내용에 의거하여 가설을 세우는 방법 이외에는 없다. 여기에서의 가설은 자이나교의 논리학에 의거하는 것이다

 그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자이나의 「상대론(相對論)」 또는 「부정주의(不定主義)」라는 것이 된다. 그것이 어떤 것이냐고 하면, 많은 종교와는 달리 자이나교에서는 교조(敎條; 도그마)를 싫어하며 「이것이야말로 진리다」라는 독선적인 주장을 배척한다. 모든 사물은 다면적인 것으로서 어떤 종교에도 어떤 주의, 주장에도 일면의 진리는 있다. 따라서 사물에 관하여 일방적 혹은 절대적인 판단을 내려서는 아니 된다. 어떠한 판단을 내릴 때에는 「어떤 점에서 보면(스야드)」라는 조건을 달지 않으면 아니 된다. 이것을 「부정주의 (스야드바다)」라고 부르는 것이다.

 많은 종교가 자기의 신이나 세계론 만을 진리라고 주장하여 때로는 종교전쟁까지 야기하여 온 역사를 되돌아 볼 때에 이것은 아주 현대적인 사고방식이 아닐까? 인도에도 종교분쟁이 수 없이 많이 있었고 또 현재도 잇따르고 있지만, 자이나교가 무력투쟁을 한 적은 한번도 없다. 모든 종교가 이러한 관점에 서면, 세계는 얼마나 평화로운 세상이 될 것인가?

 그리고 그 상대주의야말로 자이나 사원의 「차투르무카상」이나 「사면당」 형식을 발전시킨 원동력이 아닐까? 유일절대의 신을 상정하는 것이 아니라(자이나교는 무신론의 종교이다) 구세주인 24명의 티르탄카라(지나) 조차도 각각 다면적인 존재이다라고 하는 태도가, 4개의 상을 등을 마주보도록 한 차투르무카상을 낳은 것이고, 거기에서 사면당의 건축형식이 발전한 것이다.

4개가 등을 마주한 티르탄카라상

 자이나교가 24명의 티르탄카라(조사)를 상정하였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애시당초 이상하였다. 기독교나 불교와 같이 개조는 한 사람으로 충분한 것이 아닐까? 아마 자이나는 그 경우의 마하비라에 대한 개인숭배를 피하기 위하여 그리고 절대자의 존재를 부정하기 위하여 마하비라 이전에 23명의 티르탄카라를 상정하여 그들에게도 동등의 가치를 부여한 것이다.

 인도에서 태어나 또 인도에서 성장하였기 때문에 자이나 교도 또한 우상숭배의 스타일을 취하고 있지만, 기독교나 힌두교의 우상군과는 달리 자이나교의 티르탄카라(지나)상에는 개성적인 표현이라는 것이 없다. 어느 것을 보더라도 대개 동일한 자세의 입상이나 좌상의 모습을 하고 있어 전연 구별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조각작품으로서나 미술사의 연구대상이 되기 어렵고, 극단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일종의 기호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예배되는 것은 그리스도나 시바신 등과 같은 인격이나 신격이 아니라, 기호의 형태를 취하는 세계 질서 또는 우주의 다양한 진리가 아닐까?

 이렇게 본다면 자이나교가 갑자기 이슬람교에 유사하게 된다. 형태상으로는 양자는 완전히 대조적으로서, 이슬람은 절대적 일신론이지만 그 유일신이란 인격신이 아니라 우주의 질서 그 자체와 동의(同義)라고도 할 수 있다. 또한 이슬람에서는 우상이 일체 금지되어 있지만, 자이나의 티르탄카라상도 일종의 기호에 불과하다고 한다면 양 종교의 예배는 결국 동일한 것 같이도 생각된다. 양 종교가 모두 계급제도를 부정하여 이슬람에서는 신 앞에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라고 하고, 자이나에서는 윤회사상을 기초로 하여 「모든 생물이 평등하다」라고 하는 것이다.

  
백대리석 기둥의 조각과 파르슈바나타상

 이슬람은 우상숭배를 부정하기 때문에 회화나 조각은 그다지 발전하지 않아 그 조형의욕은 오로지 건축에 집중하였다. 자이나에서는 우상조각에 인격적인 표현이나 설화성(說話性)을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이나 사원도 또한 건축에 몰두하여 조각은 이슬람의 아라베스크와 같이 건축요소의 틀 중에서 장식에 경도되었다. 아마 이것이, 지금까지의 미술사가가 자이나나 이슬람의 미술을 높게 평가하지 않은 가장 큰 원인이었고 동시에 필자와 같은 건축가가 자이나나 이슬람의 건축에 한층 더 감명을 받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또 하나의 비슷한 예를 더 들자면 유럽의 시트회의 수도원일 것이다. 베네딕트회의 화려함에 반발하여 회화나 조각에 의한 허식을 배제하려고 한 시트회는, 따라서 오로지 건축의 구성과 공간의 아름다움의 개척에만 몰두하였다. 따라서 미술사가의 평가와는 달리 우리 건축가가 크게 감동하는 폰트네(fontenay)나 르·토로네(Le Thoronet)와 같은 수도원 건축을 창조하였다. 자이나교의 건축, 그 중에서도 특히 라나크푸르의 아디나타 사원은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근대의 자이나 사원

 자이나교의 건축이 라나크푸르의 사원에서 절정에 도달한 후에, 자이나에 한정된 일은 아니지만 인도의 전통적 건축양식의 발전은 종언을 고하고 이후 조락(凋落)의 길을 걷게 된다. 외래의 이슬람 건축의 시대로 들어선 것이다. 남인도를 제외하면, 독립을 유지한 힌두왕조의 건축조차도 이슬람 건축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18세기가 되면서 인도는 전면적으로 대영제국의 식민지가 되어 사원 파괴의 우려가 없어짐에 따라 자이나교도 대도시에 사원을 세우게 된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부유한 상인이었던 쉐트·하티싱이 기증한 아마다바드 시내의 사원이다. 여기에는 다변형(多辨形) 아치를 많아 사용하는 등 이슬람 건축의 영향도 보이지만, 중세의 「소란키 양식」을 부활시켜 전통적인 석조기법을 잘 전하고 있다. 그러나 평면적으로는 라나크푸르에서 완성을 본 차투르무카 형식은 버려지고 대신에 <성실 + 만다파>라는 아부산 이전의 스타일로 후퇴하였다.

  
아마다바드의 하티싱 사원     시탈라나타 사원, 캘커타

 캘커타에도 같은 시대의 시탈라나타 사원이 있다. 영국 식민지 시대에 발전한 대도시 중에서는 이채를 띠는 건물이기는 하지만, 근세의 시카라 사원과 무갈궁전 그리고 거기에 이탈리아·바로크 양식을 결부시킨 것과 같은 스타일에는 그 전의 라나크푸르와 같은 위대함은 보이지 않는다.

 자이나교가 금후 어떻게 존속해 나갈 것인가는 잘 모르겠지만, 웃탐·C·자인(Uttam C. Jain)과 같은 자이나의 현대 건축가가 차투르무카 형식에 의거한 새로운 자이나 사원을 창조할 수는 없는 것인가 하고 필자는 은근한 기대를 갖고 있다.


≪주≫
  1. 조지·미첼은 " The Penguin Guide to the Monuments of India ", vol.1, 1989 에 있어서 평면의 규모를 100m ×100m 이상이라고 적고 있지만, 그것은 잘못으로서 쿠센스(Henry Cousens)에 의한 옛날부터의 실측정치가 옳다.

  2. <가르바그리하>라는 원래 「자궁」을 의미하는 말이기 때문에 「태장실(胎藏室)」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힌두교에 있어서의 어둡고 깊은 동굴적인 이미지가 포함되어 있지만, 자이나교의 개방적인 성실의 경우에도 이 통칭을 사용하고 있다.

  3. 싯다프라는 라나크푸르의 남서쪽 약230km의 지점에 있다, 현재의 시드푸르 마을이다. 싯다프라의 차투르무카 사원의 건립은 12세기 전반이라고 하니까 앙코르와트와 거의 동시대의 것이 된다.

  4. 사류·도시는 기부자의 이름을 다르나·사로 하기 때문에 라나크푸르의 사원을 <다르나·비하라>라고 부르고 있다.

  5. 앙코르와트는 본전이 3중의 회랑으로 둘러싸이고 있고, 제2회랑의 규모는 약100m × 120m 이다. 그러나 일본에서 출판된 책의 거의가 도면의 축척을 잘 못 쓰고 있어 약140m × 170m의 크기로 쓰고 있다. 최초의 학자가 오류를 범하면 후속하는 연구자도 모두 같은 오류를 범하는 것의 좋은 실례이다.

  6. 미얀마(버마)의 파간에도 사면당 형식을 나타내는 11세기의 불교사원인 아난다가 있는데 그 중앙부에는 4개의 불상이 등을 맞대고 있다. 또한 대승원(마하·비하라)라고도 불리우는 파하르푸르의 소마푸라·비하라의 평면도는 펠리칸 미술사의 도판의 방향을 반대로 나타내어 버렸기 때문에 일본 서적의 대개가 그 잘못을 답습하고 있다.

  7. 힌두의 「사면당」이 완전히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시바·린가를 숭배하는 차투르무카 형식의 사당이 북쪽의 캬슈밀 지방에는 파야르(11세기)에, 남쪽의 뭄바이 근처의 엘레판타 섬의 석굴사원(6세기)에 각각 있다. 또한 서인도의 에크링지에는 4면의 시바상을 본존으로 하여 3면에 개구를 갖는 에카린가 사원 (15세기)가 있지만, 만다파는 정면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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