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JAINA ARCHITECTURE IN SOUTHERN INDIA
남인도의 자이나 건축

가미야 다케오

슈라바나벨골라, 찬드라기리의 언덕을 바라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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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나교의 분열

 자이나교의 개조는 마하비라이었지만, 불교에 있어서의 「과거불」과 같이 그 이전에 23명의 <티르탄카라>(지나, 조사)가 있고 마하비라는 제24대의 그리고 최후의 티르탄카라라고 한다.
 초대의 아디나타로부터 제22대까지는 완전히 전설상의 존재이지만, 제23대의 파르슈바나타는 역사상 실재한 것이 확인되고 있다. 그는 마하비라보다도 250년 정도 전의 인물로 추정되고 있으므로 자이나교의 역사는 불교보다도 매우 오래된 종교이다.

 그러면 왜 마하비라가 개조라고 불리는가 하면, 그는 파르슈바나타의 가르침을 개혁하여 종교로서 완성시켰기 때문이다. 왕족인 마하비라의 양친은 파르슈바나타의 숭배자였다고 하니까, 이미 「파르슈바교」라고 해야하는 종교가 존재한 것이다.

 마하비라는 30세에 출가하면서 모든 재산을 버리고 입고 있던 일체의 의류도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 빈털터리로 탁발의 수행을 시작하였다. 그것은 중세의 이탈리아에서의 탁발 수도회의 시조 앗시지(Assisi)의 성프란체스코가 모든 재산을 버리고 빈털터리가 되어 수행을 시작한 장면을 연상시킨다(그의 생애를 그린 영화 『Brother Sun, Sister Moon』에서는 그 장면을 모자이크 처리를 하였다.
 프란체스코가 죽은 후에 앗시지의 마을에는 그의 청빈사상과는 달리 화려한 수도원이 건설되었는데, 자이나교의 열성적인 사원건립이라고 하는 것도 그것과 닮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찬드라기리 언덕의 사원군 원경

 마하비라의 사후 수백년이 지나 자이나교가 탄생한 북인도의 비하르 지방은 12년간에 걸친 대기근을 당하였다고 전해진다. 생존을 위협 당한 자이나 교도들은 성현 바드라바흐에 인도되어 현재의 남인도 카르나타카주로 멀리 달아났다. 바드라바흐를 스승과 같이 우러러보던 자이나 교도이었던 마우리야 왕조의 시조 찬드라굽타는 이를 따라 최후에는 슈라바나벨골라에서 단식에 의한 대왕생(大往生)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들은 전설이기때문에 어디까지가 진실인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래도 기원경에 남인도에 자이나교가 도래하고 있었던 것은 확실한 것 같다. 그리고 또한 그 때까지 자이나교는 <디감바라>(공의파(空衣派))와 <슈웨탄바라>(백의파(白衣派))로 분열되어 있었던 것 같다.

 전설에 의하면, 바드라바흐가 북인도로 되돌아 갔을 때에 북인도에 머물고 있었던 자이나 교도들이 백의를 입고 있어 타락의 징후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과 구별하여 알몸 수행의 엄격한 공의파를 남인도에 확립한 것이다라고 한다. 프란체스코의 행위가 「그리스도를 따라」였다고 한다면, 바드라바흐의 그것은 「마하비라를 따라」였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북인도와 남인도의 기후의 차이도 반영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북인도의 겨울은 알몸으로 생활하기에는 춥다. 그리고 공의파와 백의파의 사이에 교리상의 차이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찬드라기리 언덕의 마나·스탬바와 빈드야기리 언덕의 고마테슈와라상


슈라바나벨골라

 남인도의 자이나교의 중심지가 된 곳은 방갈로르의 서쪽에 있는 슈라바나벨골라였다. 여기에는 마을과 사각형의 저수지(탱크)를 끼고 찬드라기리와 빈드야기리라는 기괴한 두 바위산이 마주 보는 초현실적인 땅이다. 빈드야기리의 정상에는 그 자리에 서 있었던 바위를 조각한 고마테슈와라상이 17미터의 높이로 솟아 있다.(*1)

 고마테슈와라는 바후바리라고도 하여, 초대 티르탄카라 아디나타의 아들이라고 한다. 그는 직립부동의 자세로 몇 년간을 계속 수행하였기 때문에 그의 다리는 담쟁이덩굴이 덮고 그 발 언저리에는 개미둔덕이 생겼다고 하는 전설을, 천년전의 이 조각은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이 상의 주위에도 사원군이 있지만, 건축적으로 중요한 것은 찬드라기리의 언덕쪽이다. 여기에는 대단히 우아한 마나·스탬바가 상징적으로 서 있고 12개의 사원군을 거느리고 있다. 가장 큰 것은 캇타르 사원(바스티)(*2)이지만 「남방형」 사원양식을 가장 잘 전해주는 것은 차문다라야 사원(바스티)이다.

차문다라야 사원의 입면도와 평면도

 전장에서 소개한 「북방형」의 카주라호 사원에서는 성실의 바로 위의 <시카라>가 위로 높게 올라가 수직선을 강조하고 있었던 데 대하여, 여기에서는 오히려 수평선이 강조되어 있다. 복잡한 몰딩이나 장식이 나란하게 있는 수평의 층을 계단모양으로 겹쳐 쌓음으로써 사원본체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전체의 모양은 오히려 짤막하게 보인다. 그러한 것이 반영되었는지 남인도에서는 <시카라>라는 말은 사당의 상부구조 전체를 가르키는 것이 아니고, 그 정상부의 관모양의 지붕부분 만을 <시카라>라고 부른다.

 이러한 남방형의 석조사원은 주로 현재의 타밀나두주에서 발전하였다. 그 땅의 언어인 타밀어가 일본어의 뿌리가 아닌가라고 하는 이는 언어학자인 오노신(大野晋)씨이다. 또한 인종적으로도 북인도의 아리아계와는 전연 다른 드라비다계의 인종이기 때문에, 이들 남방형의 사원도 「드라비다 양식」이라고 부르곤 한다.(*3)
 시대가 내리가면 남방형의 사원은 <비마나>(본당)이 작은 채로 남아있고, 그 대신에 주위의 <고푸라(Gopura)>(사문) 만이 점점 거대화되어 남인도의 독특한 경관을 형성하여 간다. 그러나 그것은 대개 힌두사원에 있어서 일어난 일로서 자이나 사원은 그다지 관계가 없었다.

찬드라나타 사원, 무다비드리


무다비드리의 서해안 양식

 슈라바나벨골라에 버금가는 남인도의 자이나교 성지가 서해안 쪽의 무다비드리이다. 이 작은 마을에는 18개 정도의 자이나 사원이 있는데, 어떤 마을에는 마치 일본의 「사원촌」과 같이 길 양측으로 자이나 사원이 죽 늘어서 있고, 그 모든 사원에는 전면에 마나·스탬바가 세워져 있다. 동일한 남인도이면서 서해안에서는 사원의 스타일이 타밀나두주와는 전연 다른 것에 놀란다.

 무다비드리에서 최대인 찬드라나타 사원(바사디)에 전형적으로 보이는 것과 같이 사원의 하부는 석조이더라도 상부는 완전한 목조로 그것도 맞배지붕의 구배(勾配) 지붕이 가설되어 있다. 이 마을은 카르나타카주에 속해 있지만 이 「서해안 양식」은 오히려 남쪽의 케랄라주와 통하고 있다.

 케랄라주와 타밀나두주 사이에는 서가츠산맥이 있기 때문에 이 가늘고 긴 해안가의 토지는 연중을 통하여 강우량이 많아 풍성한 녹음으로 축복을 받고 있다. 그 때문에 건조한 타밀나두주와는 전연 다른 문화가 형성되었다.
 그러한 기후풍토가 목조의 맞배지붕이라는 「서해안 양식」을 낳은 것이다. 케랄라주의 사원은 거의가 힌두교에 속하고 카르나타카주의 자이나 사원과는 약간의 차이를 보이지만, 그 맞배지붕부의 장식적인 처리와 처마를 지탱하는 초엽(草葉;bracket) 조각 등이 매우 흡사하다. 그리고 이것은 멀리 떨어진 네팔의 목조 사원과 꼭 닮지 않았나 하는 기이한 감이 든다.

찬드라나타 사원의 박공, 무다비드리

 일찌기 인도건축사를 처음으로 체계화한 J·퍼거슨은 남인도와 네팔의 목조사원 사이에는 반드시 어떠한 영향관계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그러나 그 후의 베르니에 등의 연구에서는 토지의 기후나 풍토가 비슷한 건축양식을 낳은 것이고, 양자간의 분명한 영향관계라고 하는 것은 인정되지 않았다. 네팔의 사원은 원칙적으로 사각형 혹은 모임지붕으로서 장식적인 맞배지붕은 거의 없다라는 것이 그것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무다비드리에는 지금 하나의 이상한 건물군이 있다. 그것은 마치 네팔의 다층탑과 같은 모양을 나무가 아닌 <라테라이트(Laterite)>(*4)로 만든 것으로서, 이것은 자이나교 성인들의 무덤이라고 한다. 애당초 인도에서는 힌두교에서도 자이나교에서도 목숨이 있는 것은 반드시 환생한다고 하는 「윤회」 사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무덤을 세운다고 하는 습관은 없었다. 그것이 이 땅의 자이나교 만이 무덤을 세우고 또한 네팔의 탑이나 발리의 <메루(Meru)>와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하는 것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다.(*5)

자이나교 성인의 묘원, 무다비드리


자이나교의 공의파

 남인도의 <디감바라>(공의파)는 엄격파라고도 불리우며 마하비라의 가르침을 보다 충실히 지켜야 된다고 주창하였다. 그런데 그 공언과는 달리 실제로는 오히려 승려들이 보다 세속적인 생활을 한 것 같다. 그 원인은, 남인도에서는 자이나 사원의 옆에 승원을 만들어 정착생활을 한 것에 있다.

 원래 자이나교에서는 출가스님은 1년중 우기 4개월간은 한 장소에 머물 수 있지만(안거(安居)), 건기에는 마을로, 산으로 탁발을 하면서 유람을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한 곳에 정착을 하면 반드시 세속화되어 재물을 만들고 물건에 집착하게 되어 「무소유·무집착」의 이념으로부터 멀어져 가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본의 불교가 잘 보여주고 있다. 원래 「출가」하여야 하는 승려가 집에 정주하고 가족을 만들고 돈을 벌어 승직이 가업이 되고 만다.

무다비드리의 승원(마타(Matha))에서 만난 자이나 스님도 대처승은 아니었지만 황색의 의복을 걸치고 대단히 세속화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진실한 공의파 스님을 필자가 만난 것은 북인도의 데오갈이었다. 마침 그 날 데오갈의 고찰에서는 고덕(高德)의 스님(구루(GURU))가 제자와 같이 와서 설법을 한다고 하여 근처의 자이나 교도가 많이 몰려들고 있었다. 그 선사는 이미 세속의 집착을 거의 떨어 버렸기 때문에 공작의 날개로 만든 빗자루 하나를 가진 이외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고 있었는데(*6), 그야말로 바로 공의(空衣)였다. 그들의 신인 바드라바흐와 같이 그리고 앗시지의 성프란체스코와 같이...

공의파의 구루와 그 제자들, 데오갈에서


≪주≫
  1. 이러한 거대한 고마테슈와라상은 남인도에만 보이는 것으로서, 슈라바나벨골라 이외에 카르칼, 베누르 등에 있다.

  2. 남인도에서는 자이나 사원을 <바스티> 혹은 <바사디>라고 부른다. 산스크리트어의 <바사티>에서 유래한 것이다.

  3. 남방형의 「드라비다 양식」에 대응하는 북방형의 통칭은 「나가라 양식」이다.

  4. 라테라이트는 <홍토>라고도 하는 홍색의 토양이지만, 딱딱하기 때문에 돌과 같이 사용된다. 기포가 있어, 오야석(大谷石; 일본의 도치기현(栃木県)의 오야(大谷)에서 많이 출토되는 기포가 많은 하얀 돌로서 질이 그리 좋지 않아 벽 등에 주로 사용되었으나, 근세에 미국의 건축가 프랑크 로이드 라이트가 구 제국호텔의 벽면에 대대적으로 사용하여 유명해졌다) 비슷하다.

  5. 하나의 가설로서는, 이들이 일반적인 무덤이 아니라 이 땅에서 「단식사」를 한 성인들의 기념비가 아닌가 하고 생각된다.

  6. 입에 마스크를 하는 것은 백의파의 습관으로서, 공의파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 때 처음으로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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