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JAINA ARCHITECTURE IN NORTHERN INDIA
북인도의 자이나 건축

가미야 다케오

칫토르가르의 성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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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왈왕국의 성도 칫토르가르

 북인도의 칫토르가르(*1)에는 평지에서 150미터 정도의 높이로 솟아 있는 가늘고 긴 언덕이 있다. 이것이 일찌기 난공불락이라고 일컬어졌던 메왈왕국의 칫토르가르 성도이다. 여기를 무대로 하여 델리의 무슬림군과의 사이에서 전개된 처절한 전투는 북인도에서 오래 전해지는 애화를 남겼다. 수차에 걸친 공방으로 패색이 짙어지자 왕녀를 비롯한 성내의 수천의 부녀자는 순결을 지키기 위해서 불속에 몸을 던지고, 또한 수천의 병사가 출진하여 전사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언덕의 위에 작은 마을과 많은 사원이나 궁전, 여기에 수리시설이 절반은 폐허가 되어 남아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것이 2개의 탑이다. 하나를 <키르티·스탬바>(명예의 탑)다른 하나를 <자야·스탬바>(승리의 탑)이라고 부른다. 인도에는 의외로 탑이 적어 이슬람 시대의 미나렛이나 영국 식민지 시대의 시계탑보다도 오래된 탑은 이 칫토르가르의 것 이외에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런 만큼 이들 2개의 탑은 진기하고 또한 귀중한 것이다.

 명예의 탑 쪽이 오래되어 13세기의 작품인데, 기단 위에 7층, 약24미터의 높이로 솟아 있다. 최상층은 전망홀로 되어 있어 성내를 한 눈에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주위의 평원을 지평선까지 바라볼 수 있다. 탑은 자이나교의 초대 티르탄카라(조사)인 아디나타에게 바쳐졌는데, 2층의 사면에는 각 니치(Niche;감실(龕室)) 속에 그 입상이 안치되어 있다.

키르티·스탬바(명예의 탑)

 세계의 석탑 중에서도 이 탑이 큰 매력을 보이는 것은 그 조형력이다. 조적구조의 높은 탑을 세운다고 하는 것은 구조적으로 용이하지 않으니까 대개의 탑은 단지 구조체를 그대로 나타낸 단순한 모양을 하고 있는데 대하여, 이 자이나교의 탑은 주위 일면에 지나상 등의 조각이 새겨지고, 몸통이 들어갔다 나왔다 하거나, 니치나 발코니로 음영을 나타내는 등 대단히 복잡한 구성을 하고 있어 일종의 표현파 경향으로서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조형으로 되어있다.

 또 하나의 매력은 그 내부공간으로서, 그것은 또 하나의 탑에 의하여 현저하게 나타난다. 이쪽은 비문에 의해서 라나·쿤바왕이 무슬림군에 승리한 것을 기념하여 1448년에 세워진 것을 알 수 있다. 같은 성내의 본보기를 발전시킨 것인 만큼 9층, 37미터 정도의 높이에 달한다.

 그만큼 내부의 공간도 넉넉하여 몸을 구부리지 않고도 올라 갈 수 있다. 그 오르는 방법이 단순한 나선계단을 통해서가 아니라 평면적으로는 2장의 4각형의 벽으로 이루어져 있어, 한 층 정도를 중앙의 나선계단으로 오르면 다음은 외주의 복도와 계단을 오르고 이어서 또 중앙의 나선계단을 오르는 등 변화가 풍부하다. 그에 따라 단숨에 나선계단을 올라 현기증이 난다고 하는 일이 없고, 복도에서는 신상 등의 조각이 보이고 또한 개개의 나선계단 위에는 세밀한 조각천장이 보이는 것이다. 탑 건축이라고 하는 것이 이 정도까지 풍부한 조형과 공간의 가능성을 보여 주는 다른 예를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키르티·스탬바의 최상층 전망대

스탬바(기념기둥)

 이 승리의 탑은 이전의 탑보다 크게 된 만큼 조형적으로는 약간 단조롭게 되고 말아 조각이 보다 풍부하게 되었다고는 하여도 전체적인 매력은 명예의 탑에 못 미친다. 그리고 이 탑은 자이나교가 아니라 힌두교의 비슈누신에게 바쳐진 것이다. 그런데 2개의 탑을 비교하면 신상 조각에 보이는 아이코놀로지가 결정적으로 다르지만, 건축적으로는 거의 차이가 없다. 그리고 이 성도에는 몇개의 자이나 사원과 힌두교 사원이 경합하면서 서 있다.

 즉 이들 사원이나 탑은 당시의 왕이나 대신이 그리고 물론 시민이 혹은 힌두교도이거나 혹은 자이나 교도이거나 하면서 세운 것이으로서 서로 배척하지 않는다고 하는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또한 이들 건물을 만든 건축가가 어떤 종교집단에 속해 있는가에 관계 없이, 어떤 때는 자이나 사원의 설계를 하고 또한 어떤 때는 힌두사원의 설계를 하였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현대의 건축가가 불교사원도 설계하면서 기독교 교회도 설계한다고 하는 것 같은 것이 이종교가 공존하는 땅에서는 옛날부터 이루어져 온 것이다.

사트비스·데오리 사원, 칫토르가르

 또 건축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외래의 문화인 경우에는 (이슬람 건축과 같이) 그 건축조형이 일종의 기호성으로서 나타나지만, 그 땅에서 태어나 자란 문화의 경우에는 종교의 차이보다도 기후, 풍토에 대한 적응이나 기술이 형태를 결정하는 요인이 된다는 것을, 이것은 나타내고 있다. 일본의 경우에도, 만일 불교가 일본에서 태어난 종교였다면 신도의 신사와 불교의 사원은 기본적으로 같은 건축이었을 것이다.

 그러한 기본형에 입각하여 종교의 차이에 의한 건축조형이나 구성의 일정한 기호(嗜好)라는 것도 생겨나게 된다. 칫토르가르의 탑은 어느 것이나 <스탬바>라고 부르고 있지만, 실은 <스탬바>라고 하는 것은 기둥, 그것도 주로 기념기둥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것은 고대에서는 주로 불교에 의해서 세워졌는데, 아쇼카왕에 의해서 각지에 세워진 석주가 특히 유명하다. 그 전통을 가장 잘 계승한 것이 자이나교로서, 남인도의 자이나 사원은 반드시라고 하여도 좋을 정도로 사원의 앞에 스탬바(*2)를 세운다.

스탬바의 계보
좌로부터 아쇼카왕의 석주(B.C.3세기, 라우리야·난단갈)
자이나교의 단일 바위 기둥(9세기, 엘로라제32굴), 힌두교 기둥의 일례,
남인도의 자이나교의 마나·스탬바(12세기, 구루바얀케리)

 그 <스탬바>가 중세의 북인도에서는 계단을 내포한 탑이 된 것이다. 힌두사원에 스탬바가 수반되는 것은 적은데, 그것은 가까이 있는 자이나 사원의 영향이라고 보아도 좋다. 그렇지만 칫토르가르의 2개의 탑은 그 위치로 보아 사원에 부속된 것이라기 보다는 단독의 기념기둥으로서 세워진 것이다. 명예의 탑 밑에는 마하비라에게 바쳐진 사원이 있지만, 그 건립은 탑보다 뒤인 14세기라고 보여지기 때문이다(*3). 아마 이러한 탑은 칫토르가르 이외에도 세워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 조형이나 내부공간의 복잡함에 의한 구조적인 불안정함으로부터 다른 것은 전부 붕괴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된다.


「산과 동굴」 로서의 자이나 사원군

 칫토르가르의 성내에 남아 있는 자이나교의 사트비스·데오리 사원은 아부산 사원의 스타일로 세워져 있지만, 성실(가르바그리하)의 외관은 명백하게 북방양식을 보이고 있다. 중세의 인도건축은 크게 「북방양식」과 「남방양식」으로 이분되어, 특히 성실의 상부구조에서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계단 모양으로 겹쳐 쌓아진 남방양식에 대하여 수직선의 강조되고 상승하는 것과 같은 상부구조가 북방양식의 <시카라>라고 불리는 부분이다.

아디나타 사원, 카주라호

 그 <시카라형식>이 절정을 이룬 것이 그 유명한 카주라호의 사원군이다. 지금은 한촌에 지나지 않는 이 땅도 일찌기 찬델라 왕조의 수도로서 번영하여 대소 85개의 사원이 세워졌다고 하지만, 그 중에서 25개 정도의 사원만이 현존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도 또 힌두와 자이나가 공존하여, 자이나는 동군 중에 4개의 사원을 남기고 있다. 가장 크던 간타이 사원은 포치부분 밖에 남아 있지 않고, 전체상을 보여주고 있는 파르슈바나타 사원은 주류인 힌두 사원군보다 약간 작다. 그러나 조각의 밀도는 오히려 이쪽이 높고 명품이 많다. 그 외벽에서는 지나상이 옆으로 밀려있기 때문에, 건물도 조각도 힌두사원과 자이나 사원과의 사이에 거의 구별이 없어져 버렸다.

 이들의 압도적인 박력을 갖는 사원의 최대의 특징을 나타내는 말은 「산과 동굴」이다. 외관에 있어서 시카라가 연속해 있는 것은 히말라야의 성산 카일라사를 모방한 것이고, 내부공간은 조적구조임에도 불구하고 석굴사원과 같은 성격으로 되어 있는 것은 단면도를 보면 알 수 있다. 애당초 본존이 안치되는 <가르바그리하>라고 하는 것은 「태내(胎內)」를 의미하는 말이기 때문에, 인도인에게 있어서의 사원건축의 이미지는 항상 「산과 동굴」에 있었던 것이다.

카주라호 사원의 표준 단면


자이나교의 특질

 이번에는 북인도 자이나 사원의 그저 일부분 만을 소개하였지만, 신자가 전 인구의 약0.5퍼센트 밖에 않되는 것에 비해서 자이나 사원은 각지에 너무나도 많다. 그것은 도대체 어찌된 일일까 하고 의문이 들 것이다.

 자이나교의 최대의 가르침이 <아힘사>(비살생, 비폭력)인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 때문에 재속신자도 직업선택에 있어서 일정한 방향성을 가지게 된다. 군인이나 도살업자가 되지 않는 것은 당연하고(육식도 하지 않는다), 흙을 경작하면 흙 속의 생명을 죽여 버릴까 염려가 되어 농업이나 임업도 피한다. 이와 같이 비살생의 직업을 구하려고 하면 자연히 상공업에 종사하게 되어 특히 자이나 교도에게는 상인이 많다.

 자본주의의 추진력이 금욕적이고 근면한 청교도 정신에 있었다고 하는 역설적인 사실을 분명하게 한 것은 막스·웨버이지만, 그것은 어느 정도 인도에도 적용되어 근엄한 자이나 교도가 인도의 상업활동을 크게 발전시킨 것이다. 이전의 어떤 시기에는 인도의 민족 자본의 과반을 자이나 교도가 쥐고 있었다 라고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씨는 쓰고 있다.

  
파르슈바나타 사원과 그 내부

 학생 시절에 르·코르비지에의 작품집을 보고 자란 세대의 건축가라면 기억하고 있을 것이지만, 찬디갈의 도시계획 외에 그는 몇 개의 주택을 인도에 설계하였다. 그 중의 하나인 아마다바드의 사라바이 저택의 주인은 그러한 자이나 교도의 유복한 사업가 중의 하나였다. 사라바이 저택의 광대한 부지 내에는 미술관이 마련되어 있는데, 거기에는 주된 수집품인 직물 외에 자이나교의 『칼파·수트라(Kalpa Sutra)』와 기타 대단히 정교한 세밀화나 자이나의 목조 사원의 부분적인 이축물(移築物)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이와 같이 재력을 쌓은 자이나 교도는 그 재화를 사원의 건립이나 학교, 병원 등의 건설에 기부하여 공덕을 쌓은 것이다. 델리에도 무료 병원인 「작은 새의 병원」 등이 있는데, 특히 사원의 건립이나 유지, 복구에 열심이기 때문에 신자의 인구비로 볼 때에 지나치게 많을 정도의 자이나 사원을 짖게 된 것이다.

파르슈바나타 사원, 벽면조각

 그러한 자이나 교도의 사회는, 평화헌법을 내걸고 경제발전에 전념한 전후의 일본의 모습과 비슷하다. 전쟁을 포기하여 군사비를 억제함으로써 일본은 놀라운 경제성장을 이루어 현대의 종교건축이라고 말할 수 있는 미술관이나 음악당을 전국 방방곡곡에 건설한 것은 바로 자이나 교도의 그것과 비슷하다. 그렇지만 이 나라는 바야흐로 해외파병을 하고 평화헌법을 버리려고 하는 2중적인 삶의 태도를 취하고 있지만, 자이나 교도간에는 애당초 불교나 카톨릭 같은 중앙집권적인 교단이 없었으므로 오로지 그 이념의 힘에 의해서만 고대로부터 현재까지 연면히 지속되어 왔다.

 세계에서 유례를 볼 수 없는 평화헌법도 능가하는, 모든 생물에 대한 「비살생, 비폭력」이라는 극단적인 교리를 갖는 종교가, 2,500년의 장구한 세월을 거쳐 존속하고 있는 것은 필자에게는 세계사에 있어서 기적과도 같이 생각된다.

≪주≫
  1. 옛 이름은 <치트라크타>이고, 지금은 약하여 <칫토르>라고도 부른다.

  2. 기둥 위에는 사면의 지나상을 올려 놓은 것이 대부분인데 이것을 <마나·스탬바>라고 하지만, 부지의 수호를 위해 브라흐마신을 올려 놓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을 <브라흐마데바·스탬바>라고 한다.

  3. 일찌기 마하비라 사원의 위치에 더 오래된 사원이 있었다고 하는데, 명예의 탑이 그 사원의 마나·스탬바인 것이 아닐까 하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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