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THE DELWARA TEMPLES IN MT. ABU
아부산과 델라와라 사원군

가미야 다케오


비말라·바사히 사원, 만다파

BACK     NEXT


자이나교의 가르침

 서인도의 구자라트주를 여행하고 있을 때에 감기에 걸려 마스크를 하고 아마다바드의 도심을 걷고 있었을 때였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이 놀란 것처럼 필자를 처다 본다. 특히 어렴움이 없는 젊은이들은 필자를 가리키며 자지러지게 웃는 것이 아닌가? 감기에 걸렸을 때에 마스크를 하는 것은 확실히 일본인 만의 습관인 것 같다. 외국에 나가면 마스크 등을 사고 싶어도 살 수가 없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그들의 지나친 반응은 그러한 신기함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었다. 버스에서 바로 옆에 앉은 중년의 남자가 조심스럽게 묻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자이나 교도입니까"라고. 나는 비로서 이해를 할 수가 있었다.

 서인도에는 자이나 교도가 많다. 그러나 자이나 교도 전체는 총인구의 약0.5퍼센트에 불과하니까 소수파인 것에는 틀림이 없다. 그 자이나교의 최대의 가르침은 <아힘사>라고 하는 것으로서, 「비살생, 비폭력」을 의미한다. 비살생의 대상은 인간 뿐만 아니라, 모든 살아 있는 것을 포함하여 하찮은 버러지마저도 목숨을 빼앗는 것을 피하려고 한다.

 승려가 지켜야 하는 계율은 특히 엄하여 그들이 건기 동안 여행을 할 때에도, 손에는 빗자루를 쥐고 입에는 마스크를 하고 다닌다. 왜냐하면, 한숨 돌리려고 무심코 돌 위에 앉아 거기에 있는 벌레들을 줄일지도 모르기 때문에, 반드시 빗자루로 털고 나서 앉는다. 또한 입을 벌리고 있으면, 뜻하지 않게 공중을 날고 있던 아주 작은 벌레가 입안으로 들어가 그것을 물어 죽여버릴 염려가 있으므로 입에는 마스크를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재속신자가 그렇게까지 하는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다. 아마다바드의 젊은이들은 마스크를 하고 있는 나를 보고, 자이나교에 심취한 외국인이 저런 아나크로니즘을 하고 있다라고 생각하고 웃은 것이다. 여담이지만, 이 구자라트주가 낳은 최대의 위인이 마하트마·간디이다. 비록 자이나 교도는 아니었지만, 그는 그 영향을 강하게 받아 인도의 독립운동을 하고 있던 중에도 철저히 비폭력의 사상을 관철한 것이었다.

  
비말라·바사히 사원의 외관과 회랑 소사당의 문


화려한 내부공간

 서인도의 구자라트주와 라자스탄주에는 많은 자이나 사원이 있는데, 아마다바드의 북쪽 17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아부(*1)산에는 가장 유명한 델와라(*2) 사원군이 있다. 해발 1,200미터의 아부산은 예로부터 힌두교의 시바파와 자이나 교도로부터 성산으로서 숭배되었고, 특히 사원군이 건립되고 나서는 자이나 교도에게 있어서 사트룬자야산과 함께 중요한 순례지가 되었다.

 여기에는 거의 같은 규모의 4개의 사원과 하나의 소사원(小寺院)이 들어서 있다(*3). 개개의 사원은 중심축에 대하여 좌우대칭으로 되어있는데, 사원군 전체를 관통하는 축선은 존재하지 않으며 사원을 둘러싸는 외부공간도 여분의 공간으로서 광장을 형성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각 사원이 한 세기 정도의 간격을 두고 순차적으로 조영된 탓도 있지만, 이슬람 이전의 인도에서는 도시계획이나 지역계획에 대한 개념이 얇았던 탓도 있다. 그 때문에, 전체로서 상당한 면적의 건물군 임에도 불구하고, 순례자가 여기로 접근해 가는 과정에서 강한 인상을 받는 일은 없다.


아부산의 델와라 사원군·평면도

 게다가 각 사원의 외주벽은 그다지 깨끗하지도 않고, 많은 건축물이 평평하기 때문에 뾰족한 탑이 보이지도 않아 외관은 좋은 편이 아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델와라 사원군일까 하고 눈을 의심할 정도이지만, 사원의 내부로 한 발걸음이라도 들여 놓기만 하면 거기에는 숨을 죽이게 하는 별세계가 존재한다.

 특히 멋있는 것이 초대 티르탄카라(조사) (*4)인 아디나타에게 바쳐진 비말라·바사히(*5)와, 제22대의 네미나타에게 바쳐진 루나·바사히이다. 어느 것이나 내부는 전부가 백대리석으로 만들어지고, 벽이든 기둥이든 바닥 이외의 모든 곳이 섬세하게 조각되어 그 단백색의 청정한 세계는 「이 세상의 것이라고도 생각되지 않는」 현란한 인상을 준다.

 그 중에서도 <란가만다파>(Ranga-mandapa)(회당)의 돔 천장은 매우 섬세한 동심원 모양으로 조각되고, 중앙부는 종유석의 샹델리아와 같이 아래로 늘어져 있으며, 또한 16체의 <비디야데비(Vidyadevi)>(지혜의 여신)이 더하여져 이들 전부가 석조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이다.

비말라·바사히 사원의 회랑의 천장

 다양한 의장으로 1개 1개가 조각된 기둥군을 통하여 중정으로부터의 빛이 쏟아지는 내외공간의 얽히고 섥힌 모습을 바라 보는 것은 바로 눈의 향연이다. <비마나>(Vimana;본당)가 서 있는 중정을 둘러싸는 <바마티(Bhamati)>(회랑)의 천장도 또한 모든 곳이 연꽃, 신 또는 추상적인 패턴으로 조각되어 있고, 회랑에 면하여 있는 <데바쿨리카(deva-kulika)>(소사당)군에는 각각 조사(지나)상이 안치되어 있다.

 전설에 의하면 조각사들은, 그 돌을 깍아낸 부스러기의 무게에 따라 보수가 지불되었기 때문에 섬세함이 과장되게 새겨진 것이라고 한다. 역시!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할 정도의 이 풍요로운 내부공간에 서 있게 되면 문득 먼 스페인의 알함브라 궁전을 생각나게 한다. 이슬람 건축의 저 걸작도 또한 변변치 않은 외관으로부터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현란한 별세계가 내부에 전개되는 것이다.

 세계에 위대한 건축작품이 많이 있지만, 그 규모를 자랑함이 없이 또한 조각적인 외관을 현시함이 없이 오히려 작은 스케일의 내부공간을 더할 나위 없는 치밀함으로 조각한 미크로 코스모스로서, 이것은 알함브라의 「사자의 중정 (파티오(patio))」와 쌍벽을 이루고 있다. 알함브라가 「지상의 낙원」의 실현을 목표로 한 것이라면, 이 델와라 사원은 해탈 후의 정토를 현화시킨 것일까?

루나·바사히 사원, 만다파


인도 건축사에서의 위치

 인도건축의 최고걸작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없이 라나크푸르의 자이나교 사원이라고 대답한다. 그것은 17년전에 처음으로 방문하였을 때의 직관이었지만, 그 후 종종 인도를 여행하고 약 2,000에 달하는 고금의 건축물을 촬영해 온 지금도 이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그 라나크푸르보다도 아부산 쪽이 유명한 것은, 전자가 교통이 불편한 산속 깊이 있어 마을도 없고 변변한 숙박시설도 제대로 없는 곳인데 반하여, 아부산은 19세기 초엽부터 영국인이 고원의 피서지(힐·스테이션)로 개발하였기 때문에 일본 가루이자와(輕井澤; 동경에서 가까운 유명한 피서지)와 같은 마을이 되어 델와라 사원도 사람의 눈에 많이 보여졌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인도건축 역사의 관점에서 말한다면, 그 때까지 불교건축이나 힌두건축을 추종하여 온 자이나 건축이 드디어 독자적이고 또한 인도건축의 최고봉에 도달하게 되는 과정에서 그 일보 직전의 가장 우수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라나크푸르는 후에 소개할 예정(제6장)이지만, 여기에서는 아부산으로부터 거기에 도달하기 까지의 과정을 살펴 보기로 하자.

루나·바사히 사원의 기둥 조각

 소란키 왕조(*6)의 치세에 대신을 역임한 비말라·샤는, 정치를 하는데 있어서 살생을 범한 것의 보상으로서 아디나타 사원을 건립하였다. 그래서 비말라 사원이라고도 불리게 되었지만, 그러나 이 때에 세워진 것은 <가르바그리하>(Garbhagriha;성실), <구다만다파>(예배당), <트리카만다파>(전실) 뿐이고, 더구나 그 재료는 가까이서 산출되는 흑대리석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그것은 힌두교 사원과 아무런 차이도 없는 보통의 사원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과 가까운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미완성으로 끝나버린 핏타르하라(Pittalhara) 사원이다.

 그러나 12세기가 되면서 경내는 회랑으로 둘러싸이게 되고, 그리고 <란가만다파>(회당)이 세워지고 3면의 회랑과 연속되어졌다. 여기에서 양상이 일변하여 중정이 인테리어화한 것이다. 그 때까지의 인도건축이 석굴사원을 별도로 한다면, 오로지 조각적인 외관을 만드는 것에 몰두하여 내부공간은 빈약한데 반하여, 처음으로 외부보다도 내부를 중시하는 건축을 발전시켰다. 또한 그 재료는 전부 쿰바리아에서 가까운 채석장으로부터 1,200미터의 산상으로 날라진 백대리석으로 만들어지고 새로운 양식이 결정된 것이다.

 13세기가 되어 자이나 교도에게 있어서의 메디치가(Medici家)가라고도 일컬어지는 테자팔라(Tejapala)와 바스투팔라(Vastupala) 형제에 의해서 한층 더 섬세한 조각으로 장식된 네미나타 사원이 동일한 양식으로 건립되었다(테자파라의 아들 루나싱하의 이름을 따서 루나·바사히라고도 불리운다). 1311년에는 이슬람의 발지 왕조의 침공에 의해서 상당히 파괴되었지만, 그 후에 끊임없이 복구되어 19세기에 도달할 때까지 조각의 정밀도가 계속 올라갔다.

  
루나·바사히 사원의 주돔천장과 소천장의 조각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비할데 없는 건축작품에도 난점은 있다. 진정한 아치를 모르고 있던 인도의 건축가나 석공은 진정한 돔의 공법도 알지 못하여 방사상으로가 아니라 수평으로 돌을 겹쳐 쌓아서 적조구조(積組構造)의 돔으로 이것을 만든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후의 이슬람 건축과 같은 대스팬(大span)의 돔을 가설하는 것이 불가능하여 최대의 것이라고 하여도 비말라 사원의 예와 같이 지름이 약7미터에 지나지 않았다(비자푸르의 골·굼바즈의 돔은 지름 38미터나 된다).

 그리고 또 최고 스케일의 조각도 개개의 상을 바라 볼 때에, 힌두교 조각의 역동성이 풍부한 조형과 비교하여 어딘가 부족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조각은 어디까지나 건축을 위한 부수적인 것이고, 여기에 소비된 모든 에너지의 목적은 정토 공간의 현화에 있었던 것이다라고 할 수 있다.

 델와라 사원의 최대의 가치는 인도건축에 있어서의 공간성의 창출에 있고, 그것은 우리의 현대 건축가에게 가장 공감되는 관점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이 더 발전한 것이 카라타라 사원에서 보이는 신형식을 통해서 라나크푸르의 아디나타 사원으로 발전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다음에 다시 살펴 보기로 하자.

카라타라 사원 (파르슈바나타 사원)


≪주≫
  1. 인도건축사를 처음으로 체계화한 J·퍼거슨이 "History of Indian and Eastern Architecture" 에 <아-부-산>이라고 표기한 이래 많은 미술사가가 그것을 흉내내어 왔지만, 자이나 학자들은 장음기호 없는 <아부산>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마치 그 중간을 취한 듯이 건축사가인 M·A·다키타는 <아-부산>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또한 정부측량국에 의한 현대 주지도 및 도시지도에도 <아부산>이라고 표기되어 있기 때문에 필자도 이것을 채용한다. 산스크리트의 옛 이름은 <알부다>라고 한다.

  2. 이것도 <델바다><딜와라>등 많은 표기가 있을 수 있지만, 그 평균적인 것으로 하여 도시 지도에도 사용되고 있는 <델와라>를 채용한다. E·디쯔(Ernst Diez)에 의하면, 어원은 deul(데울, 사원)과 wara (짚, 지구)의 결합이라고 한다.

  3. 비말라·바사히의 남측에 마하비라 사원이 있는데, 이것만이 다른 것과 달리 매우 작다.

  4. 자이나교의 개조인 마하비라를 <지나>(승자(勝者)) 혹은 <티르탄카라>(조사)라고 부르지만, 그 이전에도 23명의 조사가 있었다고 한다. 모든 자이나 사원은 이러한 조사 중의 어느 하나에게 바쳐지고, 그 지나상을 본존으로서 숭배하고 있다.

  5. <바사히>는 남인도에서의 <바스티>와 같이 「사원」을 의미하고, 산스크리트어의 <바사티>에서 유래한다. 그러나 <바사히>도 <바스티>도 자이나교의 사원 이외에서는 사용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는 자이나교도 포함시켜 사원은 <만딜>이라고 한다.

  6. 10∼13세기에 구자라트 지방을 지배하였다. <차울키야 왕조>라고도 하지만, 건축사에서 중요한 남인도의 <찰키야 왕조>와 혼동하기 쉽기 때문에 보통 <소란키 왕조>의 통칭을 사용한다. 12세기에 자이나 교도이었던 쿠마라파라왕의 시절에는 자이나교의 학문·예술이 크게 발전하였다.



BACK     NEXT

© TAKEO KAMIYA 무단전재를 금함
일문 및 영문 메일은 이쪽으로 하십시오(원저자)
kamiya@t.email.ne.jp
한글 번역문에 대한 오류/감상은 이쪽으로 하십시오(번역자)
go2tajmahal@hanmi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