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 INVITATION to INDIAN ARCHITECTURE
인도 건축 입문

가미야 다케오

インド建築入門
(『인도의 건축』의 서장(序章)과 종장(終章)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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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건축으로의 초대

 인도라고 하는 말을 들으면 그 곳은 아득히 먼 지방이면서 우리들의 가슴에는 무엇인가 아련하고 정겨운 감정이 솟아나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고대의 세계4대문명의 하나가 발흥한 곳으로서 이후 중국과 더불어 면면히 고도의 문명이 발달하여 주변 제국에 영향을 주어 온 아시아의 대국이며, 또한 세계대전 후에는 비동맹국의 리더였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들에게는, 인도는 무엇보다도 불교가 전래된 곳으로서 인도를 「인도(印度)」라고 하던 시대보다 훨씬 전에는 「천축(天竺)」이라고 하여 삼장법사(三藏法師)와 손오공(孫悟空)이 찾으려 했던 서방(西方)의 낙토(樂土)로서 아득히 먼 이상향(理想鄕)의 곳이었다.

제1스투파와 西門, 산치

 그러나 근세에 들어서서 인도에는 다른 아시아 제국과 마찬가지로 유럽 제국주의가 침략하여 들어와 대영제국의 식민지가 되고 철저히 착취(搾取)되어 빈곤의 구렁텅이에 빠지고 만다. 이것은 옛날의 부(富)와 정신적인 풍요함과 대비되어 그 큰 괴리로 인해 인도에 대한 우리들의 이미지는 혼란스럽기만 하다.
 또한 근대, 현대의 아시아 각국, 특히 명치유신(明治維新) 이후의 일본은「탈아입구」(脫亞入毆 즉 아시아 영역을 벗어나 유럽(세계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의미로서 근대판 세계화를 의미) 의 기치하에 인도를 비롯한 남아시아 제국에 대한 관심을 잃고 오직 서양에만 신경을 쓰고 그들을 좇아가고 추월하는 데 매진하였다.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굴곡이 또한 인도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를 만들고 말았다. 「인도는 신비한 나라」라든가 「불가사의한 나라」라고 하는 것 등이다. 인도에 관한 출판물이나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타이틀에는 <신비한>이나 <불가사의한>이라는 수식어가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어떤 문명도 그것에 소원한 사람들이 본다면 신비하게 보이는 것으로서, 인도에 신비사상(神秘思想)이 있듯이 유럽 문명이나 기독교에도 신비주의(神秘主義)는 존재하는 것이다.

 아시아가 가까스로 서양 일변도에서 달피하고 있는 작금, 우리는 인도를 비롯한 제3세계의 문화를 경제에 의거한 차별이나 신비주의라고 하는 색안경을 끼지 않고 그 본래의 모습과 가치를 통하여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인도의 문화, 예술을 개관하여 보면, 인도의 음악이나 무용이 고도한 것처럼 인도의 건축도 또한 매우 독특하고 위대한 업적을 남기고 있다. 본서는 이러한 신비주의에 의거하지 않는 인도 건축의 본래의 모습을 많은 컬러 사진과 함께 소개하고자 하는 것이다.

힌두교의 무크테슈와라 사원, 부바네슈와르

 인도를 한 번이라도 가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몇몇 인도 건축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중국, 일본 등 동양의 건축이나 서양의 건축과는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신들의 조각이 가득찬 대사원이나 바위 산을 깎아 만든 석굴사원, 오로지 기하학적 분할(幾何學的 分割)만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과 같은 모스크 등 인도 건축은 신비롭다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건축물이라고 하는 것은 그림이나 문학과는 달라서 합목적적(合目的的)으로 만들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 미지의 건축 문화도 그 근본바탕을 알게 되면 모두가 합목적적으로 성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합목적에 근거하여 이루어진 독자적인 표현이나 사상이 바로 건축의 예술성(藝術性)인 것이다. 인도대륙에는 합목적에 근거한 고도한 표현의 건축 작품이 무진장 흩어져 있다.

 한편, 인도는 거대한 나라이다. 지리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유럽 전체에 필적할 만한 광대함과 깊이를 가지고 있는 문명권이다. 수많은 건축유산을 가지고 있는 나라이기는 하나, 인도에는 극단적으로 거대한 조영계획(造營計劃) 이라고 하는 것이 없다. 중국의 만리장성이나 이집트의 피라미드, 로마의 도시계획과 같은 것을 인도에서는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인도문명의 영향하에 있었던 캄보디아나 인도네시아가 앙코르나 보로부두르 등과 같은 거대한 조영물 가지고 있다.
 인도는 오히려 일본이나 유럽과 같이 적당한 규모의, 밀도(密度)가 높은 조형을 좋아했던 것 같다. 그러한 적당한 크기의 친밀한 스케일감을 갖는 풍성한 세계야말로 인도건축의 매력이다.




인도의 종교와 건축


시크교의 본산 암리차르의 황금사원

 본서에 있어서 저자는 가능한 한 다양한 인도건축의 모습을 소개하고자 한다. 역사적으로도 지리적으로도 종교적으로도 건축물의 종류에 있어서도 인도건축이 가지고 있는 다양성(多樣性)과 포용력(包容力)을 표현하고 쉽다. 본서의 사진을 죽 살펴보면, 변화무쌍하고 다양한 모습에 놀랄 것이다. 유럽의 건축과 비교하여 보아도 인도건축은 너무 다양하여 일관성이 없는 듯이 보일 것이다.

 그 원인중의 하나는 종교(宗敎)의 다양성(多樣性)에 있다. 유럽에서는 중세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원칙적으로 기독교를 신봉하여 왔다. 카톨릭과 개신교가 있지만, 그 차이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큰 것도 아니고, 건축사적으로 양식(樣式)의 구별을 가져오지도 않았다. 마치 힌두교의 시바파와 비슈누파의 차이나, 이슬람교의 수니파와 시아파의 차이에 불과하다.
 그러나 인도에서는 힌두교 이외에 고대에서는 불교, 중세부터는 이슬람교가 지배적인 종교가 되었던 적이 있고, 그 외에도 자이나교나 시크교, 근세부터는 기독교 등이 각지의 도시경관에서 눈에 띄는 건물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그 때문에 이들 종교에 대하여 간단히 설명을 하면서 건축과의 관계를 살펴보는 것이 본서를 이해하는 데에 유익할 것이다.

 인도에 있어서 지배적(支配的)인 종교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힌두교이다. 그러나 이 종교는 서양적인 개념의 종교와는 많이 다르다. 불교나 기독교와 같이 창시자(創始者; 개조(開祖))가 있는 것도 아니므로, 불교가 부처의 가르침이요, 기독교가 예수의 가르침이라고 하는데 반하여 힌두교에는 어떤 특정인의 가르침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근본을 이루는 것은 하늘에서 전해졌다고 하는『베다(Veda)』의 문학, 『라마야나(Ramayana)』나 『마하바라다(摩訶婆羅多)』 등의 서사시(敍事詩), 그리고 『마누법전(Manu法典)』 등의 법전류이다.

 힌두교라고 하는 것은 굳이 표현하고자 한다면 <인도인(印度人)의 사고형태(思考形態)나 생활관습(生活習慣)의 총체(總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충분히 체계화되지 않았던 고대적인 형태를, 후세의 성숙한 단계와 구별하여 <바라문교(婆羅門敎)>라고 부르고 있다. 태생에 따라 정해지는 바라문(婆羅門) 계급만이 사제(司祭)로서 신과 인간의 사이를 교통할 수 있는 제식종교(祭式宗敎)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에 대하여 기원전5~6세기에는 고대 그리스에서와 흡사한 자유 사상가와 철학자가 배출되어 의식(儀式)이나 산 제물(犧牲) 그리고 카스트 제도에 집착하는 바라문교에 대하여 반기를 들고 일어났다. 그 대표격이 불교를 일으킨 부처, 자이나교(Jaina敎)를 일으킨 마하비라((Mahavira)였다.

불교의 마하보디 사원, 부다가야

 이 두 사람은 대우 유사한 인생을 살았다. 모두 동인도의 비하르(Bihar) 지방의 <크샤트리아(Kshatriya)>(왕후, 무사) 계급의 왕자로서 태어나 결혼하여 아이를 둔 후에 모든 재산과 가족을 버리고 사문(沙門; sramana; 出家者)이 되고, 긴 고행과 명상을 거쳐 도(道)를 깨우쳤다. 두 사람의 출생과 사망 시기에 대하여는 여러 설이 난무하여 정설이 없으나, 마하비라가 오래 산 것 같다. 부처는 깨우침에 이르는 길로서 「고락(苦樂)의 중도(中道)」를 설파(說破)하였지만, 마하비라는 철저한 고행주의자(苦行主義者)였고 그 근본 교리는 <아힘사(Ahimsa)>(비살생(非殺生), 비폭력(非暴力))이었다.

 자이나는 중앙집권적(中央執權的)인 교단(敎團)을 만들지 않고 포교에도 그리 열성적이지 않아 큰 세력을 형성한 적은 없다. 한편, 불교는 교리의 온건성 때문에 널리 보급되었고 또한 지배계급(支配階級)과 밀착되어 바라문교를 누르고 인도의 지배적인 종교가 되었다. 그 중에서도 불교를 열심히 옹호한 것은 기원전 3세기에 인도의 대부분을 정복했던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왕이었다.

 고대의 건축유산으로서 불교는 많은 유적을 전국토에 걸쳐서 남기고 있으나, 자이나교의 유산은 매우 드물다. 그리고 불가사의하게도 바라문교의 유산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따라서 인도의 고대건축은 불교건축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5~6세기에는 바라문교가 점차 이론 무장을 하고 불교에 대항하게 되었다. 이러한 성숙단계를 <힌두교>라고 부르고 있으나, 원래 <힌두(Hinduism)>라고 하는 것은 신두강(Sindhu江, 인더스강) 유역의 사람(즉, 서쪽에서 본 인도인)을 가리키는 말로서, 그들의 종교가 <힌두교>(인도교)이고 그 언어가 <힌두어>이다.

티벳 불교의 티크세 곰파

 힌두교는 고도의 철학적 발전을 성취함과 아울러 인도 각지의 토착신앙, 제신(諸神), 전설, 풍속을 흡수하여 사람의 마음을 끌고, 한 권의 책으로는 집약되지 않는 방대한 신화와 법전의 체계를 구축하였다.

 지배층과 밀착한 불교는 점차 그 토대를 잃어 밀교(密敎)에서 탄트라(Tantra) 불교에 이르는 시기에는 힌두교의 영향도 받았으나, 결국 13세기에는 인도에서 그 모습을 완전히 감추고 말았다. 그 대신에 아시아 제국으로 퍼져나가 세계적인 종교가 되었고, 현재의 인도 국경 내부에서 최북단의 라닥크 지방과 시킴(Sikkim) 지방에는 라마교(Lama敎)라고 불리는「티벳불교」가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인도 본토에 있었던 많은 불교 사원과 승원은 지키는 사람이 없어지게 됨에 따라 점차 붕괴되고, 파괴되어 지금은 거의 폐허나 발굴지로서만 남아 있다.

 한편, 자이나교는 불교와는 달리 국외로 전파되는 대신에 서인도를 중심으로 면면히 계속되어 많은 건축유산을 남기고 있다. 세력에 있어서는 소수파였기 때문에 건축적으로도 불교나 힌두교의 뒤를 쫓는 것이 많았으나, 11~15세기의 서인도에서는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다.

자이나교의 마하비라 사원, 쿰바리아

 한편, 자이나교는 불교와는 달리 국외로 전파되는 대신에 서인도를 중심으로 면면히 계속되어 많은 건축유산을 남기고 있다. 세력에 있어서는 소수파였기 때문에 건축적으로도 불교나 힌두교의 뒤를 쫓는 것이 많았으나, 11~15세기의 서인도에서는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다.
 자이나교는 바라문교를 부정하면서 성립된 종교였으므로 본래 무신론적(無神論的)이다. 사원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神이 아니라 24명의 조사(祖師)였고, 이들을 <티르탄카라(Tirthankara)> 라고 한다. 24인째이면서 최후의 티르탄카라가 마하비라라고 불린다.

 외래 종교인 이슬람교는 7세기의 아라비아에서 시작되었다. 예언자 마호메트가 신의 약속을 사람들에게 전파하였는데, 그것은 성전으로서『코란』에 쓰여져 전해오고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신은 유일(唯一)하다는 것, 그리고 신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平等)하다고 하는 것이다. 이 평등사상 때문에 이슬람은 단기간에 서쪽으로는 스페인에서 동쪽으로는 중앙 아시아까지 퍼져갔다.
 전파되는 곳마다 예배당인 <모스크>를 비롯한 이슬람 건축물을 만들었으나, 각지에는 선행문명이 있었기 때문에 이슬람의 원리와 토착 건축문화가 융합함으로써 지역마다 서로 다른 이슬람 건축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슬람교의 살림 치슈티 무덤, 파테푸르 시크리

 인도로의 유입은 11세기에 시작하여 서쪽 변경인 페르시아의 이슬람 건축이 들어왔다. 16세기에 성립된 무굴 왕조는 그것을 인도의 토착 건축과 융합시킴으로써 인도-이슬람 건축을 절정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 있어서는 유일신(唯一神)의 이슬람과 다신론(多神論)의 힌두교는 격렬하게 충돌하였다. <알라신>은 절대자로서 눈에는 보이지 않는 존재이므로 그것을 우상(偶像)으로 표현하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그것뿐만 아니라 예언자 마호메트는 물론, 사람도 동물도 우상으로 하는 것은 모두 금지되었으므로 모스크에는 일체의 우상조각이나 벽화가 없다. <무슬림>(이슬람교도)에게 우상이 넘쳐 흐르는 힌두사원은 허용할 수 없는 존재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무슬림이 이종교(異宗敎)의 건축물이나 문화를 철저하게 파괴하였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오히려 이슬람교는 이교도(異敎徒)에게 관용적(寬容的)이었다.
 이슬람은 인도에서 지배자의 종교가 되었으나, 민중(民衆)이 종전과 같이 힌두교를 신봉하는 것은 세금만 더 내면 허용되었고, 서인도의 라지푸트(Rajput) 제국도 무굴 왕조와 군신관계(君臣關係)에 있으면서도 힌두교의 반독립 왕국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힌두교도 자이나교도 현재까지 지속될 수 있었고, 수많은 위대한 사원건축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기독교의 아프간기념 성당, 뭄바이

 인도에 기독교가 전래된 것은 매우 빨라, 전설로는 사도(使徒) 토마스(Thomas)가 전도 여행을 하였다고 하나 그 진위는 알 수 없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16세기에 포르투갈에 의하여 전해져, 고아(Goa)나 코친(Cochin)에는 당시의 교회당수도원 이 많이 남아 있다. 인도를 영국이 지배하고 나서는 영국교회도 전래되었고, 4대도시를 비롯한 각지에 카테드랄(Cathedral)과 교회 교구당(敎區 敎會堂)이 지어졌다.

 외래문화로서의 이슬람과 비교하면, 기독교의 경우에는 어디까지나 유럽풍의 건축형식에 의한 <콜로니얼 양식>을 취하여 토착 건축과의 융합은 추구하지 않았다. 그것은 기독교쪽이 이슬람교보다 비관용적인 종교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현재의 인도에 있어서 종교인구의 비율은 1981년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힌두 82.6%, 이슬람 11.4%, 기독교 2.4%, 시크교 2.0%, 불교도 0.7%, 자이나 0.5%, 기타 (팔시(Parsee; 즉 조로아스터(Zoroaster)교도), 유태교 등) 0.4%.

 당연한 것이지만 현대건축에 있어서는 종교가 건축 발전에 있어서 큰 역할을 하고 있지 못하다. 새로운 사원이 지어진다고 해도 대부분 옛날의 양식을 따라서 지어진다.
 왕년에 인도건축을 변화시키고 새로운 양식을 탄생시켰던 종교의 영향력에 상당하는 강력한 존재는 지금은 서양의 문화이고, 과학기술의 문명일 것이다. 그것을 구현한「근대건축」이 전통건축과 충돌하면서 인도의 도시 경관을 천천히 그리고 확실하게 바꾸고 있는 것은 제3세계의 어느 나라와도 마찬가지이다.




인도건축의 소개방법


아바네리의 쿤다

 인도이건 유럽이건 그 건축문화를 소개하는 데에는 다양한 방법이 있다. 다양한 종교를 포용하고 있는 인도에 있어서는 건축을 종교별로 나누어 소개하는 방법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건축물이 종교건축이지도 않고, 또한 인도건축을 종교별로 나누어 논한 제임스 퍼거슨(James Fergusson)은 E.B.하벨(Havell)에 의하여 강한 비판을 받았다.

 하벨에 의하면 인도의 모든 건축물은 단지 지속되어 온 「인도건축」이지, 종교에 의한 차이 등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불교가 좀더 지속되었다면 힌두교와 같은 사원건축을 만들었을 것이고, 인도의 이슬람 건축은 인도건축 이외의 어느 것도 아니다라고 하는 의견은 어느 정도 맞는 이야기다.

 좀더 적당한 방법으로서는 역사적으로 건축 양식이나 기술을 따라가는 방법이 있는데, 이렇게 되면 건축사의 서적이 된다. 또한 지리적인 순서로 각지의 건축물을 보아 가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본서는 그런 것과는 달리 시대의 구분도 하지 않고, 지리적인 순서도 없이 종교의 차이를 넘어서 인도건축의 다양한「특성」을 통하여 인도건축을 이해하고자 하는 시험인 것이다.
 지리적으로 이야기 한다면, 인도는 한랭지역인 히말라야 지방에서부터 서부의 사막지대, 남부의 열대우림에 이르기까지 기후와 풍토에 큰 변화가 있고, 그에 따른 건축적 형태의 다양성이 있다.

 유럽의 경우를 예로 들면, 우리들의 유럽에 대한 이미지는 영, 독, 불, 이태리라고 하는 곳의 건축문화에 한정되고 마는 경향이 있으나, 유럽에서도 북유럽에 가면 거기는 목조문화이고 교회당의 조형도 매우 이교적으로 보이는 것이 있고, 남부 스페인에 가면 거기에서 알함브라 궁전을 비롯한 이슬람 건축물을 보는 것도 가능하다. 고대 켈트의 조형에서 동구의 비잔틴 성당, 유태의 시나고그(Synagogue) 등은 다양한 건축조형을 보여 줄 것이다. 이것들은 유럽에 있다고 하는 의미에서「유럽건축」인 것이다.

찬디가르의 고등법원, 르 코르뷔지에 설계

 본서에서 저자가 의도하고자 한 것도 인도건축을 좁은 범위에서 대표적인 양식에만 한정하지 않고, 북쪽의 라다크(Ladakh) 지방 티벳 불교의 조영에서 최남단의 케랄라 지방의 목조문화까지를 가능한 한 공평하게 픽업하여 「인도건축」의 전체상(全體像)을 보이고 싶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본래의 인도건축의 범위로서 현재의 인도 영토를 넘어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또한 인도의 고건축만이 아니라 영국 식민지 시대의 영국 건축가가 설계한 식민지 건축,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뒤의 현대건축까지도 소개하고자 한다. 그것은 옛날에 무슬림이 인도를 침입하여 이슬람 건축물을 세운 것과 마찬가지로서, 인도에 세워진 이슬람 건축은 역시 인도의 건축인 것과 같이 인도와의 관련에서 세워진 식민지 건축도 또한 인도의 건축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도대륙을 무대로 하여 다양한 왕조, 종교, 민족을 위하여 세워진 건축물의 총체야말로「인도건축」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결어


힌두교의 비마칼리 사원, 사라한

 인도건축의「특성」을 탐구하는 26장의 여행은, 고대의 목가적인 흙무덤과 동굴에서 시작하여 콘크리트와 유리로 장식된 고층의 현대건축에서 끝이 났다. 인도대륙에 흩어져 있는 방대한 건축유산 전체에서 160곳의 건축물이라 하는 것은 매우 한정된 수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다양한 시대와 지방의 전형적인 스타일이나 특징적인 형태는 인도건축의 많은 부분을 나타내지 않았을까 한다. 따라서 본서를 한 번 통독한 독자라면 새삼스럽게 인도건축의 다양성에 놀랄 것이다.

 특히 목조건축의 존재는 의외였는지 모른다. 2번, 3번 인도를 여행하면서 보이는 것 거의 모두가 석조건축이었으나, 히마찰프라데시주와 케랄라주를 여행하면서 목조의 힌두교 사원을 천천히 관심있게 관찰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히말라야 삼나무로 둘러싸인 히말라야의 마을 마을은 우리에게는 옛 생각을 떠올리게 하는 광경으로서, 거기에 서있는 목조사원은 변화가 풍부하다. 일본과 동남 아시아의 목조건축과 비교하면 흥미가 끊이질 않았으나, 산 너머 산의 오지는 여행하기에 지극히 곤란한 지역이기도 하고 또한 정보도 충분히 얻을 수 없었다.

 한편, 남쪽의 케랄라주는 훨씬 여행하기 쉬운 곳이기는 하나, 이들 힌두교 사원은 이교도에게 매우 엄격하다. 상반신은 벌거숭이가 되고, 하반신에는 룬기(lungi)라고 하는 하얀 허리 둘레를 하고 맨발이 되어서야 비로서 경내로 들여 보내주는 사원도 카메라의 반입은 절대 허용되지 않는다.
 자이나교의 산악 사원도시를 방문하는 것도 또한 매우 어려운 여행이었다. 샤트룬자야산 (Mt. Satrunjaya)기르나르산 (Mt. Girnar) 에서는 몇 시간에 걸쳐 산을 오르고 또 내려가야 하는 고행을 해야 했다. 다리는 후들후들 떨리고 죽을 각오로 정상에 오르니, 거기에는 숨을 삼켜버릴 것 같이 전개되어 있는 광경이 피로를 말끔히 잊게 만들었다.

 이와 같이 인도 여행은 편한 것은 아니지만, 가는 곳마다 새로운 놀라움이 있고 발견이 있다. 따라서 인도건축의 특성을 논할 수 있는 키워드를 픽업하니 금방 26개나 되는 장이 구성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것으로 인도건축의 「특성」을 충분히 설명했는가라고 묻는다면, 역시 불만족스럽다. 보다 다른, 보다 효과적인 구성도 가능했는지 모른다. 가능하면 본서를 토대로 하여 보다 신선한 인도건축론을 전개하는 젊은이가 나타날 것을 기대한다.

말리카르주나 사원의 주두 조각, 쿠루밧티

 본서의 26장의 여행에서는 개개의 키워드에 대한 특성과 그에 대한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그들 모두를 관통하는 인도건축의 가장 큰 특성은 무엇일까? 그것은 두 가지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인도인이 모든 조형예술 중에서 <조각>을 가장 좋아 하였기 때문에 건축물도 조각처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인도의 사원건축을 보러 다니다 보면, 독립된 사원이든지, 석굴사원이든지, 석조든지 목조든지 구석에서 구석까지 대단한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는 것에 감탄을 금하지 못한다. 건축물은 거기에 조각을 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들 정도이다.

 이에 비하여 벽화(壁畵)는 훨씬 적고 조각처럼 중요한 역할을 하지도 않는다. 일본인이 그림을 좋아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이러한 경향은 근대까지 계속되었다. 건축가인 안토닌 레이몬드(Antonin Raymond)는 그의 자서전에서 인도 체재시의 인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인도에 화가가 거의 없다는 것이 나에게는 불가사의였다. 일본에서는 집에서 심부름을 하는 사람조차 그림을 그렸고, 그 그림도 좋은 것이었다.》

 인도인은 건축물의 내외를 조각으로 장식할 뿐만 아니라, 건축물 전체를 거대한 조각으로 간주하고, <매스(Mass; 맛스(Masse))>로서의 조형 표현을 탐구하였다. 그것은 건축이 <스페이스>(공간)을 둘러싸는 기술이요, 예술이라고 하는 생각과는 대칭적인 위치에 있는 것이다.
 많은 힌두사원을 방문하여 그 조각적 표현의 훌륭함에 감탄하면서 내부로 들어가면, 그 내부 공간의 빈약(貧弱)함에 놀라는 경우가 많이 있다. 내부는 어둡고 작은 「동굴」로서, 전체로서는 어디까지나 외향적(外向的)인 조형적 건축인 것이다.
 시대가 내려감에 따라 벽면을 장식하는 조각은 점점 번잡함을 더하고, 그대로 더 진행되었더라면 인도건축은 매우 편향(偏向)된 것이 되었을 것이다.

나게슈와라 사원의 고푸라 상부, 쿰바코남

 그러한 경향을 되돌리고 방향수정을 가하였던 것이 이슬람 건축의 도래였다. 우상숭배를 철저하게 거부하는 <이슬람>은 조각과 회화 등의 우상적 표현을 금지하고 공간을 둘러싸는 피막(皮膜)으로서의 건축을 발전시켰다. 이것이 인도의 전통건축에 자극을 주어 궤도를 수정시킨 것이다.

 한편, 인도의 이슬람 건축은 역으로 토착 건축의 영향을 받아 다른 이슬람권의 건축과 비교하여 매우 조각적이고 외향적인 표현을 하게 되었다. 페르시아적인 조형 언어의 타지마할묘 조차도 인도건축이기 때문에 그렇게 훌륭한 조각적 표현을 하게 된 것이다.

 두 번째는 인도의 주요한 건축물은 석조임에도 불구하고 목조적인 원리에 의하여 지어졌다는 것이다. 고대 인도에서는 지금보다 목재가 풍부하였으므로 인도건축은 목조에서 기원하였으며 중세에 석조건축이 주류가 되었어도 목조적인 가구(架構)와 표현에 집착하였다. 이슬람 건축이 전파하였던 <아치>와 <돔>이 전해진 뒤에도 기둥, 보에 의한 가구법(架構法)에 집착하여 돌을 나무처럼 사용하였다.

  
악바르 대제의 무덤, 아그라 교외의 시칸드라

 거기에는 구조적인 우열보다도 몸에 깊이 배인 미적 감각이 중요했을 것이다. 인도에 이식된 이슬람 건축도 또한 그 영향을 받아 다른 이슬람권에서는 볼 수 없는 가구법의 이슬람 건축을 발전시킨 것이다. 무거운 돔 지붕을 아치를 사용하지 않고 가는 기둥과 보만으로 받치고 있는 <채트리 (Chatri)> 는 그 전형적인 예이다.

 목재와는 달리 인장력에 약한 석재를 보나 상인방(lintel)에 사용하는「축조가구법(軸組架構法)」은, 돌과 기와를 방사형으로 쌓아 큰 스팬(Span)을 걸치는 아치나 돔과 비교하여 이론적으로 떨어지는 것은 확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인은 그것을 고집하면서 위대한 건축물을 쌓아 올렸다.

 그것은 단선율(單旋律)의 인도 음악과 매우 비슷하다. 서양의 폴리포니(Polyphony; 多聲) 음악과 비교하면 단선율의 음악은 이론적으로는 떨어진다. 그러나 예술적인 성취는 이론만으로 비교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도의 음악은 단선율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철저하게 탐구함으로써 매우 고도의 이론과 음악표현을 달성하였다.
 마찬가지로 인도의 석조건축도 역시 목조적인 기둥, 보의 구조나 내쌓기 구조(Corbelled Structure)의 돔을 철저하게 탐구함으로써 이슬람 건축이나 유럽 건축에 비하여 손색이 없는 건축문화를 만들어 내었다. 그 극치, 절정은 라나크푸르(Ranakpur)에 있는 자이나교의 아디나타 (Adinatha) 사원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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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네샤, 우다이푸르의 민속화, 라자스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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